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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붙여서 (독일 손병원님 기고)

by eknews02 posted Oct 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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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붙여서

나는 그간 예상치 못한 질병에 걸려 5주일간 병원신세를 졌었다. 이 또한 세상사는 길이라 치부했다.

은퇴 후 매 이틀마다 6년 이상 피트니스로 다진 건강에 자신했는데 한 방으로 흔들렸다. 내 몸 속을 후빈다는 것은 엄청난 기력의 탕진이다. 그리고 2 시간마다 어김없이 저절로 깨어지는 것 또한 그런 고문이 없다. 숙면을 취한다는 것은 나이 들어 절대 보약이다.

이제 빠른 회복기에 접어들어 마음을 내려놓으니 세상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면서 사물이 크고 깊게 보이도록 노력한다.
바둑을 배울 때에는 자기 돌만 보이다가 중급쯤이 되면 싸우려고 한다. 실력이 붙으면 제 돌을 먼저 돌보게 된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은 명징한 계절이다. 세상 기후변화가 어찌됐건 나는 24 절기로 세상 가는 것을 갈음한다. 달력에 음력이나 절기가 표기되지 않으면 만들다 만 달력이라 여긴다. 24 절기는 태양이 움직이는 길 즉 황도를 24 등분하고 15일 간격으로 이름 지었다.

그러니까 절기는 (태) 양력기준이지 음력에서 따온 것이 아니다. 한 달 두 달 지난 달 다음 달 다른 달의 달( )에다 양력조차 1월 2월이니 많은 이들이 음력에서 나온 거라 착각하게 된다.
고유명절인 설날 추석이 음력기준이다 보니 헷갈릴 수 도 있겠다.

초복 중복 말복은 정식 절기가 아니다. 24절기에 사용되는 역법은 음력이다. 절기에 맞게 이름 지어 농사 일의 기준을 삼았으니 옛사람들의 생활의 지혜에 그저 탄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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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여름이 다 타고 난 뒤 시작된다.

가을은 9월부터 11월까지이다. 가을을 알리는 입추 다음에는 농작물에 이슬에 내린다는 백로. 낮과 밤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 찬 이슬이 맺히는 한로. 서리가 내리는 상강.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 첫눈이 오는 소설이 가을에 걸려있다.
가을이 끝나는 건 초승달을 두들기는 여인들의 다듬이 소리가 한창일 때이다.

가을 추(秋)자를 파자 하면 벼(禾)가 햇볕 (火)에 익는다는 뜻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의 농경사회에서 으뜸인 쌀농사를 기준으로 가을이라 했으니 오곡백과가 결실 맺는 풍성함을 어디에 견주리요. 또한 가을은 한 해를 보낸 내 삶의 성적표를 스스로 받아보는 바도 있어 가을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가을은 다른 절기보다 길게 더디게 가는 느낌이다.

그만큼 이것저것 기대수치가 높다. 드높은 가을 하늘에 제 마음껏 움직이는 흰 그림의 뭉게구름에 눈이 시원해지고 공기는 살갑다. 아이들이 띄우는 연이 뭉게구름에 어른거리는 모습도 잘 어울린다. 가을을 상징하는 대목이 엄청 많다.

옛날로 되돌아가면 그 시절 세월이 문턱 문턱 떠오른다. 시골 기차역주위에서 피어난 코스모스는 승객들을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작별의 한들거림에 마음이 싱긋 하다. 귀뚜라미나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합창이 가을을 노래하고 아낙네들의 김장준비가 한창일 때에는 기러기 떼들이 가을 들녘을 가른다. 반딧불이 야광을 떼어 속 눈썹에 붙이면 동무래도 섬 득하다.

황금벌판을 지키는 허수아비와 참새들의 분주함과 빨간 고추잠자리가 떼지어 빙글거리고 토실한 메뚜기는 한창 제 철이다. 곱게 물든 낙엽을 책 갈피에 끼우는 가을이다.

은하수는 점점 밤 하늘 가운데로 모인다. 따스한 이에게 엽서 한 장을 띄우는 마음도 정감 어리다.
가을에 쓰는 편지는 그리움으로 쓰여진다. 어느 시인은 낙엽 밟는 소리를 애잔하게 읊조려 가을의 감성을 제대로 자극했다.
가을은 천고마비(비록 원 뜻과 달라졌지만) 등화가친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한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나 여인의 옷 고름 푸는 소리보다도 책 장 넘기는 소리가 정겹다. 가을 물은 소 발자국에 괸 물도 먹는다는 속담처럼 계절이 그윽하고 맑으매 사람들의 마음도 청명해진다.

어린 시절 고향 살 때에 가을에 접어들면 가까운 시골에서 남정네들은 각종 물건이나 먹거리를 푸짐하게 지게에 지고 아낙네들은 광주리에 가을을 이고 왔다. 거기에는 햇밤 풋콩 버섯 햇과일 등이 담아 있고 참기름 병의 이빨 빠진 것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포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오는 다라이 아줌마들은 소금에 적당히 절은 생선을 가득 담고 왔다. 가지고 오는 내용에 따라 어디에서 사는지 절로 알게 된다.

소깝(솔 가지)갈비 장작을 실은 지게는 대개 보신탕 집이나 국밥 집 또는 여관 앞에 즐비 선다. 빨리 팔려 시간이 넉넉하면 막걸리 한 사발에 되돌아가는 발걸음이 춤췄다. 아낙네들은 신문지에 싼 양잿물을 조심스럽게 챙기고 매일 궁둥이에 흙 묻혀 사는 아이들 군것질거리와 비린내 나는 생선 몇 마리에 흡족해했다.

한가위 추석에서 먹성풀이를 한다.
나는 어릴 때 여관 운영하는 큰 집과 같이 지냈기에 먹는 실력이 대단했다. 큰 집이 종갓집이라 수 많은 제삿밥을 자다가 깨서 제사 지내고 먹은 탓이다. 네 다리 달린 것은 책상 빼고 다 먹었고 날개 달린 것은 비행기 빼고 무차별 다 먹었으나 마시는 쪽은 체질이 아니었다.
지금도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단풍 진다.

한가위 보름에 보름달 같이 둥근 떡이 아닌 반달모양의 송편을 먹는 연유는 오늘 같은 보름을 준비하며 서서히 다시 차오르는 반달 같은 상징성에 희망 기대감을 일게 하기 위함이다.
한국에는 송편 중국에는 월병 일본에는 쓰키미당고가 계절의 떡이다.

가을 단풍잎 떨어진 자리에서는 다음 봄을 기다린다. 가을은 달과 같이 무르익어간다.
달을 대상으로 수 많은 글들이 쓰여졌고 쓰여지고 있다. 가을의 소슬함이나 풍광을 노래한다. 가을을 영어로 Fall. Autumn 이라 부르는데 (잎)떨어진다 하여 Fall이다. Autumn은 영국인이 즐겨 사용하고 Fall은 미국인이 좋아하는 단어로 배웠다. 폴폴 떨어지는 Fall 낙엽이 쌓이는 길목마다 낭만이 쌓이고 떨어져있기에 더 그리운 사람은 가을로 다가온다.

풍성한 오곡백과는 저마다 한 해의 기운을 모았다. 음식을 먹는 것은 그 고유 정기를 취하는 것이라 사람은 자연과 한 몸이다.
나는 특히 사과를 좋아한다. 출출할 때에는 사과로 배를 채운다. 가끔은 무식해도 좋다. 내 몸의 70%는 사과의 힘이다. 병치레하는 가을을 맞이하여 내가 더 담대해지고 가슴을 키워야겠다.

가을이 너무 벅차 버거운 사람들이 있다면 내 가슴을 열어줘 가을을 마음대로 넘나들게 위안을 준비해야겠다.
이 찬연한 가을에. 꿈이 있는 한 나이는 없다.

2018. 가을녁에서 손 병원 글 쓰다.
woniker@web.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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