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94) - 바람의 기억

by 편집부 posted Jan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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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94) - 바람의 기억


7. 꽃비의 계절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니?"

문득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둥둥 떠서 들어왔던 조화가 생각났다. 황망한 죽음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리본을 두루마기 소매처럼 날리며 들어왔던 3단짜리 조화 하나. 그때 거기 리본에 적힌 엘지유통 대표라는 직함과 기남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러게. 한 십년? 근데 넌 옛날 모습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더 고와졌어. 나는 이렇게 폭삭 늙었는데 말이야."

기남이 손바닥으로 제 볼을 거칠게 비벼대며 말했다.  

"늙기는, 아주 멋지기만 한데. 사장님 티가 역력해."

정아가 손사래를 쳤다. 

"사장은 무슨. 그거 말아먹은 지가 언젠데."

 기남이 옆의 영미와 은지를 차례로 바라보며 측은하게 말했다. 정아가 영미 어깨에 팔을 올려 어깨동무를 했다.  

"참, 인사해, 여기는 내 친구, 저 꼬마 숙녀는 내 분신이야."

 영미가 손을 내밀었다.   

"친구 분 미모가 상당하시네요. 공항이 다 환합니다."

기남의 눈길이 영미의 정신을 훑었다. 

"어머, 눈도 높으셔라! 감사합니다."

영미가 목례를 하며 이를 드러냈다. 기남은 허리를 굽혀 은지에게도 악수를 청하고는 이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남은 초등학교 친구였다. 아마도 두 번 정도 같은 반을 했을 것이다. 기남이네 집은 깊은 산골에 자리하고 있어서 등하굣길에 반드시 정아네 동네를 거쳐야 했는데, 체구가 큰 데다 나이도 두 살이 많아 정아네 동네 아이들이 절절 맸었다. 기남은 옛날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수염을 깨끗이 밀고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은 머리를 예전 까까머리로 되돌리면 예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았다. 

"근데 공항에는 무슨 일로?"

정아의 물음에 그가 꽁지머리를 훑어 내리며 말했다. 

"너 픽업하러 왔지."

그가 캐리어 둘을 양손에 잡고는 나가자고 턱짓을 했다. 정아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다시 재촉을 해서야 자석에 이끌리는 못처럼 따라 나섰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기남이 요리조리 자가용 사이를 헤집고 돌다가 이윽고 노란색 택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산적 같은 놈이 불쑥 나타나서 놀랬지?"

기남이 트렁크를 열고 캐리어를 넣으며 말했다. 옆에서 힘을 보태던 영미가 기남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주 매력적인 산적이신데요."

기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번에는 정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도 얼떨떨하다. 이 택시도 그렇지만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도 신기해."

"어서 타! 시간 많으니까 가면서 얘기하자. 자 두 아가씨도 타시고요!"

기남이의 시선이 다시 또 영미의 가슴을 거쳐 다리로 내려갔다. 영미가 은지를 번쩍 들어서 좌석에 올리고는 저도 자리를 잡았다.  

"우리 정아가 이리 유명인사인 줄 알았으면 새벽밥 해묵고 올 걸."

운전석에 앉은 기남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하하... 저한테 정아는 영원한 귀빈입니다. 그러니 친구 분도 역시 귀빈이지요. 언제라도 오세요."

조수석에 앉은 정아는 좌석 정면 보드에 붙어있는 택시허가증을 바라보았다. 거기 사진 속에 기남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있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택시가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4차선의 직선 도로로 나서자 정아가 고개를 돌려 기남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공항에 손님 태우러 왔다가 나를 본 거야?"

"너 태우러 왔다니까."

"농담 말고!"

기남이 피식 웃었다가 이내 정색했다. 

"거짓말 아냐. 나도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 전혀 몰랐다니까. 오전에 차부 근처에 차를 대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보니 노인네 한 분이 저 편 버스정류장 그늘에 앉아 있더라고. 처음에는 신경도 안 썼지.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나도록 그렇게 있으니까 약간 걱정이 되는 거야. 꾸벅꾸벅 졸고 계셨거든. 저러다 앞으로 넘어지면 코가 깨지겠고, 뒤로 넘어지면 뇌진탕이 분명하다 싶어 노인네한테 갔어. 말벗이라도 해서 정신 좀 차리게 할라고. 그런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세상에나 동네 따지고, 자식들 훑다 보니까 정아 네가 딱 나온 거야. 야, 내가 얼마나 놀랐겠냐?"

"설마 그 노인네가 우리 엄마?" 

"그래, 너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지."

"어머나, 은지 할머니가요?"

창밖 풍경에 눈을 팔고 있던 영미가 자세를 고쳐앉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어머님을 안전한 역 대합실에 모셔놓고 이렇게 바람처럼 달려온 거 아닙니까."

정아는 그제야 어제 저녁 엄마와 했던 통화가 떠올랐다.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실까봐 미리 일정을 말씀드렸던 것이다. 

"아니, 몸도 성치 않은데 뭐 하러 차부까지 나오셨다니. 내가 미치겠다. 길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 

"아마 아침 차를 타고 나오셨나봐. 오직 손주와 딸내미가 보고 싶었으면 그러셨을까. 부모 마음이 다 그런 거지."

"아무튼 너무 고맙다."

정아가 기남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학창시절 기남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남은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반면 운동을 잘했고 반대로 정아는 운동을 싫어하는 대신 우등상을 놓친 적이 없어서 서로 어울릴  조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아와 기남이가 사귄다는 둥, 둘이서 아우라지 강을 건너가 데이트를 하는 걸 봤다는 말까지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건 순전히 등하굣길이 같아서 나온 오해였을 것이다.  

기남은 혼자 싱글벙글거렸다. 정아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힐끔거렸다. 정아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 것도 인연인데 두 사람 정식으로 통성명하지?"

영미가 기다렸다는 듯 요금을 계산하는 폼으로 앞 의자에 몸을 바싹 붙였다.

"가는 동안 짐짝처럼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영미라고 해요."

"저는 안기남입니다. 잘 안기는 남자라고 기억해주세요."

영미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기남이 정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거 기분 째집니다. 내가 좋아했던 친구도 만나고 이렇게 멋진 아가씨도 모시게 되어서 말이지요."

"어머, 고마운 말씀이네요. 근데 우리 정아를 좋아하셨나 봐요?"

"당연하지요. 학교 다닐 때 정아 좋아하지 않은 남학생 없었거든요. 공부 잘하지 예쁘지 착하지 성격 좋지, 뭐 나무랄 데가 없었거든요."

정아가 고개를 모로 틀어 기남을 바라보았다. 영미가 톤을 높여 말을 이었다. 

"역시 싹부터가 달랐군요. 우리 직장에서도 정아는 인기 짱이에요."

룸미러에 기남의 눈이 나타났다. 

"아, 정아가 일본어 강의를 한다고 하던데 영미 씨도 일본어 선생님이구먼요."

"아....네, 그...럼요."

영미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정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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