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심원의 사회칼럼

박심원의 영화로 세상 읽기 (37): 웨딩드레스

by 편집부 posted Feb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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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심원의 영화로 세상 읽기 (36): 웨딩드레스

감독:권형진  
주연:송윤아(서고운) 김향기(장소라)
개봉: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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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도심에서 공부하다 한동안 강원도 고향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무기력증에 걸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마치 생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자와 같은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온 몸이 아팠다. 설수도 없었으며 앉거나 누울 수도 없는 통증이 내 작은 생을 짓눌렀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 작은 예배당에 나가 고통 없이 하나님 나라에 가기를 소망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가 내게 다가왔다.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그녀가 건네준 것은 의외로 만화책이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녀의 얼굴도 이름조차도,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내 안에서 또 다른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게 해 주었다. 그녀가 건네준 만화책은 죽음의 늪에서 건져 주는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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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내용은 소라의 꿈이었다. 주인공은 '독고 탁'이다. 고교야구선수인데 중병에 걸려서 야구의 인생을 접고 시골로 낙향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내 인생과 맞아 떨어지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닷가에 나가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리따운 소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는 소년에게 소원을 말한다. 바다속에서 소라를 던져 그것이 물 위로 떠오르게 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소년은 거절한다. 바다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그는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간절히 소원한다. 소년은 웃옷을 조심스레 벗고 바다에 들어간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소년은 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소라를 집어 빛이 비추이는 저 하늘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그가 외쳤던 희망의 소리는 '애해라 소라야!' 였다. 소라는 깊은 바다를 뚫고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그것은 소녀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 이상의 선물은 소년의 병이 치유되는 것이다. 소년은 다시 그의 인생을 던지는 투수의 자리에 선다. 그의 공을 받아 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바다속에서 소라를 던지는 힘으로 그의 생은 다시 시작되었다는 내용의 만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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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책이나 노트엔 소년의 외침을 적어 놓곤 했다. 작은 소녀는 내 작은 생의 소중한 벗이 되어 주었다. 노래를 불러 주었다. 함께 기도해 주었다. 그러면서 내 작은 육체는 활기를 얻었다. 그리고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녀도, 만화의 주인공 소년도 까맣게 잊고 인생의 험준한 산맥의 절반을 넘어 섰다. 영화는 삶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오래 전에 영국 전통 스타일의 앤티크 회전의자를 선물 받았다. 선물이 아니라 사용하던 분이 더 이상 사용할 가치가 없어서 버리려는 것을 얻어 온 것이다. 몇 가지 손을 보았더니 고전적 의자가 되어 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의자를 뒤로 젖힐 때 마다 나는 모기 소리 같은 소음이다. 처음에는 거슬러서 지체에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기름칠을 하라 했다. 의자에 앉아 내 인생을 뒤로 젖힐 때마다 들려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인생의 윤활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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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장치가 없다면 소음을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악기에서 소음을 내고, 감동이 되는 음을 낼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능력 차이 때문이다. 그 능력이 삶의 윤활유 역할을 해 준다. 내 인생에 있어서 영화는 그렇게 삶의 윤활유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재료가 되어 준다. 앞으로 나갈 수 없어 몸도 마음도 정체되었을 때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영화에 집중하여 몰입한다. 영화는 홀로 본다. 영화에 몰입할 때 사모와 아이들이 방해를 할 때 괜스렌 표현할 수 없는 짜증이 난다. 영화를 즐기기 위해, 혹은 무력한 시간을 보내는 방편이 아니라 내 인생의 영화 관람은 도(道) 그 자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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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한지 십 수 년이 지난 영화일지라도 현대에 개봉되는 영화보다 더 많은 감동과 좋은 영상을 제공해 준다. 권형진 감독, 송윤아, 김향기 주연의 <웨딩드레스>는 깊은 곳에 잠재 되었던 눈물샘을 자극한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직 마음이 화석화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눈물은 내 작은 마음에 평온함을 선물해 준다. 슬픈 영화를 볼 때 남녀와 관계없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인간이다.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눈물 흘리는 것을 창피하게 여길 수 있다. 기쁜 영화라면 하늘이 떠나갈 정도로 웃으면 된다. 슬픈 영화면 울면 된다. 물론 슬픈 영화든, 웃음을 선사하는 영화든 픽션(fiction)일 뿐이다. 픽션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삶의 윤활유가 되는 것은 허구적인 것이다. 내 인생이 죽음의 늪에서 허덕일 때 희망을 준 것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소녀, 그리고 그가 건네준 하잖게 여겨지는 만화책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내 인생에 거룩한 윤활유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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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은 '소라'다. 소라는 아버지를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소녀이다. 그의 어머니는 웨딩스레스 디자이너다.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 안에서 커져만 가는 암세포는 예쁜 딸 소라와 함께 오래도록 살 수 없음을,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엄마의 삶의 패턴을 바꾸려 한다. 바쁘게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니 딸에게 핸 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이의 소풍 날짜를 기억하지 못해서 허둥지둥 김밥을 싸주지만 처음 하는 것이기에 먹을 수 없었다. 홀로 보내야 했기에 할 수만 있다면 딸과 함께 보내려 한다. 그러나 딸은 홀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소라의 작은 삶에 개입하려는 엄마의 사랑은 이방인이 된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 품에서 잠든 딸을 향해 눈물로 고백한다.

"엄마한테 소라는 선물인데, 
 소라한테 엄마는 선물일까?"

엄마는 깨닫는다. 그래서 슬프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딸과 함께 보내기 위해 입원을 거절하면서 생애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보낸다. 결국 죽음의 사슬은 그녀에게 자유를 허락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을 남기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소라 역시 엄마의 죽음의 직전에 최상의 것을 선물한다. 결벽증 성격을 고치는 것, 친구를 만드는 것, 하고 싶지 않았던 발레를 공연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죽어가는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었다. 인생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그가 원하는 것을 선물해 주는 것이다. 선물은 저 하늘의 별을 따오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다. 내 인생의 어린 시절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소녀, 그녀가 건네준 만화 잭이었으며, '독고 탁'에게는 소라를 던지는 거였다. 영화의 주인공 소라에게도 엄마의 소원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어설프지만 발레 학원에 잘 다녀서 발표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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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누구나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다. 꿈은 거대하지 않고 일상에서 이룰 수 있는 작은 것이다.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때 큰 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은 어떻게 보면 이룰 수 없는 꿈을 막연하게 꾸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사랑하는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행복이었다. 그 행복은 엄마 생애동안 고통스럽게 여겼던 홀로 살지 않는 행복한 결혼이었다. 그러하기에 그녀 인생이 담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훗날 결혼을 해야 하는 딸을 위해 만들어 놓는 것이다. 주인공 소라의 꿈 역시 큰 것에 있지 않다. 엄마와 함께 오래도록 사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상의 감사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인생을 향해 무거운 메시지를 영화는 담아내고 있다. 



박심원  유로저널칼럼니스트
- seemwon@gmail.com
-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 박심원 문학세계 
- 카카오톡 아이디: seem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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