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여 배우열전을 연재하려 한다. 지난 번 영화 소재의 고갈을 언급한 바 있지만, 사실 요즘에는 ‘스타’에 대한 관심은 강해도 ‘배우’에 대한 관심은 많이 적어진 탓에 ‘배우’의 고갈 시대를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카데미나 깐느를 비롯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어떤 배우가 연기상을 수상했다 해도 그로 인한 효과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영화 소재의 고갈에 따라 영화 캐릭터 역시 이제는 어떤 캐릭터를 봐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어진 탓에 그만큼 배우들이 진정한 배우로 자리잡기가 더욱 어려워진 탓도 있다.
이번 배우 열전을 통해서는 비평가나 관객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명배우로 인정받는 이들도 물론 다루게 되겠지만, 가급적 일반 관객들에게는 다소 덜 알려진, 그럼에도 보석같이 빛나는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 그리고 그들이 출연한 작품들을 나름대로 소개하는 데 그 의의를 두려 한다.
배우열전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제니퍼 제이슨 리(이하 제니퍼)를 소개한다. 그녀는 분명 이 시대 몇 남지 않은 최고의 여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관객들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지명도가 낮은, 그러나 감독들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손꼽히는, 그래서 ‘스타’가 되기에는 너무나 ‘배우’적인(?)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출연한 작품들의 대부분이 흥행에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해왔던 탓에 일반 관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녀의 출연작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녀의 작품선택 기준이 다소 상업성을 노린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피해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주는 경우가 많다.
1981년 ‘타인의 눈’이라는 호러물로 영화 데뷔를 한 제니퍼의 초기작들은 말 그대로 별볼일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나 그 중에서 한 작품이 눈에 띄는데 바로 ‘원초적 본능’으로 유명한 폴 버호벤 감독의 1985년 작 ‘아그네스의 피’. 그러던 중 제니퍼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을 만났으니, 바로 울리히 에델 감독의 1989년 작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였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다소 심각한 작품인 본 영화를 통해 제니퍼는 주인공인 창녀, 트랄라 역을 신들린 듯한 연기로 소화해 내며 비평가 및 감독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출연작들 가운데 관객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작품들로는 소방관의 이야기를 다룬 ‘분노의 역류’, 브리짓 폰다와 함께 출연한 스릴러 ‘위험한 독신녀’, 스티븐 킹 원작의 스릴러 ‘돌로레스 클레이본’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추천하는 작품은 1991년 작인 ‘러쉬(Rush)’와 1993년 작인 ‘숏컷(Short cuts)’이다. ‘러쉬’는 다름아닌 에릭 클랩튼의 명곡 ‘Tears in heaven’이 주제가로 사랑 받았으나 정작 영화는 묻혀버린 안타까운 작품이며, ‘숏컷’은 비록 제니퍼가 주연은 아니지만 로버트 알트만이라는 천재 감독의 재기가 넘치는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관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니퍼의 연기 및 작품 자체로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들이다.
1995년 제니퍼가 직접 제작에도 참여한 ‘조지아’는 제니퍼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드러낸 수작이다. 음악인으로 성공한 언니와 역시 음악을 사랑하지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여동생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본 작품에서 제니퍼는 동생 새디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이후 1999년 작인 ‘엑시스텐즈’는 ‘플라이’와 같은 기괴한 작품들로 유명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연출로 인체와 접속하는 생체 컴퓨터 게임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소재와 함께, 제니퍼의 멋진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비록 관객들에게 환호를 얻어내는 스타의 자리에 서지는 않았지만 제니퍼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뉴욕 비평가 협회와 보스턴 비평가 협회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1995년 ‘조지아’로 뉴욕 비평가협회상과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미세스 파커’로 전미 비평가협회, 시카고 비평가협회 선정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조금도 부족함 없는 철저한 배역 연구에 감성도 풍부한 제니퍼는 그야말로 다분히 영화적인 배우라 할 수 있겠다. 가장 최신작은 니콜 키드만과 출연한 ‘Margot at the Wedding’이며 2001년에는 ‘결혼기념일에 생긴 일’로 감독 데뷔를 하면서 전천후 영화인으로 발돋움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