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참 좋아하는 영화광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어디선가 한 번쯤은 봤음직한, 비슷한 스토리와 비슷한 화면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대부분인지라 정말 새로운, 흥미로운 영화를 만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 같은 고민은 비단 필자만의 것이 아닌,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직면한 그것일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비록 최신작은 아니지만 최근에 흥미롭게 감상한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하려 한다. 뻔한 영화들에 지친 관객이라면 한 번쯤 신선함을 느껴볼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다. 반면, 전형적인 헐리우드 오락물이나 잘 만들어진 수준급의 우리 영화들만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그다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 두 작품 모두 이미 DVD로 출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구해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트레이드(Trade, 2007)
제목만 보면 무슨 무역, 거래와 관련된 영화인가 싶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에서 거래되는(이렇게 표현하자니 정말 찜찜하지만) 품목은 놀랍게도 사람, 그것도 어린 여성들이다. 바로 이 영화는 성매매를 목적으로 하는 인신매매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멕시코, 인신매매 조직에게 납치된 어린 여동생을 찾는 멕시코 소년의 여정, 그리고 이에 개입하여 도움을 주는 미국 경찰관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미덕은 자칫 전형적인 헐리우드 납치, 추적극에 그칠 수도 있었던 소재를 상당히 냉정하게, 또 현실적으로 묘사해 내는 연출력에 있다. 즉,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화면 속의 모습들이 단지 허구로 그려지는 가상 사건이 아닌, 바로 이 순간 지구 어디선가 발생하고 있을 그 생생하고 참혹한 현실을 불편하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작 추악한 행위 가운데 하나일 인신매매, 성매매, 그리고 이를 둘러싼 거대한 조직과 시스템,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수요자들, 바로 내 동생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무서운 현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을 외면하는, 혹은 동조하는 현 시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관객들이 알아볼 수 있는 배우는 형사 레이 역을 맡은 케빈 클라인 뿐이다. ‘프렌치 키스’에서 멕 라이언의 파트너로 나왔던, ‘데이브’에서 주인공 데이브 역을 맡았던 중견 헐리우드 배우. 여동생을 찾아 애쓰는, 또 마지막에 냉정한 복수를 감행하는 주인공 호르헤 역의 세자르 라모스는 어린 나이와 짧은 경력에도 놀랄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이 영화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전달하면서 성매매, 인신매매 예방,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미국을 지적하고 있다.
CIA 추산 매년 5만에서 10만의 소년, 소녀, 여자들이 인신매매로 매춘굴이나 성노리개로 미국에 팔려온다. 전 세계적으로는 백만 이상이 인신매매로 국경을 넘고 있다. 우리가 찾으려 하지 않기에 미국에 피해자가 없는 것이다.
- 미국 국무부, 인신매매 담당보좌관
싸이퍼(Cypher, 2002)
폐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큐브’로 전 세계 관객들을 열광시켰던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큐브’ 다음 연출작. 어떤 이유에선지 2002년 개봉작이었음에도 이제서야 감상하게 되었다. 이미 ‘큐브’에서 가상 현실에 대한 뛰어난 묘사로 정평을 얻었던 만큼, 본 작 ‘싸이퍼’에서도 빈센조 나탈리는 현 시대와 유사한 듯 싶으면서도 다른, 훌륭한 가상 현실을 담아내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영화는 다소 흔하다면 흔한 기억 조작, 이중 스파이와 같은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이전의 유사작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치밀한 구조와 화면 묘사를 통해 관객들을 흡입하고 있다. 기억이 조작되고, 자아가 혼돈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비단 영화 속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 많은 정보와 매체들 속에서 진정한 진실과 자아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져 가는 우리네 현실이 반영되어 묘한 섬찟함을 자아낸다. 주연을 맡은 모건 설리반 역의 제레미 노덤은 비록 많이 알려진 배우는 아니지만 마치 신경 쇄약에라도 걸린 듯한 주인공 모건을 잘 표현해내고 있으며, 설명이 필요없는 루시 리우가 신비한 여인으로 등장하며 영화의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이야기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가 자극적이거나 스피디한 화면 전개가 없는 탓에 다소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복잡한 스토리를 그만큼 탄탄하게 연출한 작품인 만큼, 평범한 오락물에 실증난 관객이라면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