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미술사의 뿌리가 된 에게 문명(Aegean civilization)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등 오리엔트 문명을 그리스에 전달하는 교량적 역할을 한 것은 에게 문명이었다.
에게 해는 지중해 동쪽의 크레타섬, 그리스의 미케네와 티린스 및 소아시아의 트로이를 잇는 바다이다.
이 세 지역을 삼각형으로 바다를 끼고 연결하는 <에게 문명>은 서양사의 가장 중요한 중심 문명이다.
그러나 이 에게문명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19세기 이전까지 아무도 몰랐다. 물론 트로이의 전쟁은 신화로만 알고 있었다.
19세기 중엽, 독일의 고고학자 H.슐리만에 의한 트로이 ?미케네의 발굴과 영국의 고고학자 A.J.에번스에 의한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의 발굴 등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에게문명 (Aegean civilization)은 지중해 동부 에게 해 주변 지역에서 BC 7000~3000년과 BC 3000~1000년에 번영한 고대문명이다.
크레타섬, 키클라데스제도, 그리스 본토의 남부, 소(小)아시아 서해안의 트로이 등 지역으로 크레타로 대표되는 남방계의 도서문화와 미케네로 대표되는 북방계의 본토문화로 나눠진다.
이 지방은 다도해(多島海)로서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데다가 기후도 온난하여, 포도 ?올리브 등의 천연산물이 풍부해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했다.
당시 선진 문명사회(先進社會)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 오리엔트문화권과 해상교통을 통해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일찍이 개화(開化)되어 이들과 함께 높은 문명을 이루었다.
에게문명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크레타섬이 중심이 된 기원전 3000년부터 1400년까지의 크레타문명 혹은 미노스 문명의 단계이다. 크레타 문명은 아케아인의 그리스민족이 북쪽 대륙에서 남하하여 크레타섬을 습격함으로써 그리스 본토의 티린스나 미케네 혹은 트로이로 퍼져나간 것 같다.
조그마한 섬에 지나지 않던 크레타가 당시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나 시리아의 세력과 대항할 힘과 재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섬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가장 에게해 적인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수출품으로는 기름과 술 이외에 목재 공예품이 있었고, 수입품으로는 상아, 금속, 콩 등이 있었으며 중계무역도 행해졌다.
후기는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티린스 혹은 소아시아의 트로이가 중심이 된 시대이다.
미케네 문명은 다시 도리아계의 그리스민족이 남침함으로써 1200년 경에 종말을 맞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레타 문명은 오리엔트의 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 다른 창조적 측면이 있었다.
크레타 문명의 대표 유적인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를 보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신, 예배, 전쟁과 같은 장면이나 왕이나 왕족, 무장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인물과 동식물의 표현 역시 획일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신선하고 자유롭게 그려져 있다. 거기다가 사람은 똑바로 서 있지도 않고 정좌하지도 않고 걸어가거나 몸을 비틀어 대화를 하거나 때로는 뛰거나 하고 있어서 가만히 서있는 것이 없다. 동물도 그렇고 식물도 바람에 흔들리든가 해서 좌우가 대칭이 되는 일이 없다.
이러한 벽화가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오리엔트 미술과는 대조적인, 다시 말해서 오리엔트의 <정>과 <형식주의>에 대한 이 지방의 <동>과 <자연주의>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자연주의는 그 속 깊숙이 크레타 인들의 자연에 대한 애착과 귀의에 연결되어 있다. 광대하고 불변하는 자연 속에서 오리엔트 인은 공포와 신비감을 품었다.
반대로 규모가 작고 변화가 많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크레타 인들은 친근감을 느끼고 애착을 가졌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British Media / writer Jun H..Hⓒ)
필자(h.h.Jun)미학 및 미디어 강사/ 한국에서 시인과 미술평론 및 연출가로 활동하다 현재 런던에서 체류하며 미디어 강사와 작품활동을 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