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보다도 위대한 바로크 미술의 특색 7
반 카라바조의 입장에서 선
'니콜라스 푸생'
바로크의 미술이 재미가 있는 것은 톡톡 튀는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고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도 때로는 거세게 반대를 하며 치열하게 자기의 개성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선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조화' 와 '균제미'로 마치 연병장에 도열한 군인들 같이 일정하고 엄격한 질서로 모두 일치된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서야 아름다움이 조화와 균형, 균제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면서 이렇게 질식할 정도로 조화와 균제미를 추구한다.
그러나 다시 그것을 파괴할 때 더 큰 미적인 힘이 파생된다는 것을 보여준 미술가가 바로크 시대에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가 앞장에서도 밝혔듯이 카라바지오였다. 카라바지오는 미술의 역사상 동료 화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화가로 당시 그의 스타일이 전 유럽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당시 유행에 거칠게 반항하고 카라바지오에게 가장 반기를 들은 골통이 있었다. 그 화가는 프랑스의 바로크 미술가인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 ~ 1665)이다.
런던의 내셔날 갤러리에서 니콜라스 푸생은 한 방에 수십 점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어 비교적 그의 미술 세계를 소상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는 그림의 전통을 그리스와 로마 시대로 이어진 맥에서 찾고 카라바지오가 보여준 '생동감'이나 '극적인 효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려는 태도 자체를 천박하다고 경멸했다.
푸생은 그림은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같이 완벽한 조화와 균제미가 이루어져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니콜라스 푸생은 감성보다는 이성이 아주 발달한 화가로 실제로 수도자 같은 건전한 생활을 했다.
이 완벽성을 지향하는 도덕주의자가 살인과 폭행죄로 15번 이상을 체포 당하고 끝내 도망 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은 카라바지오를 좋지 않게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푸생과 가까이 하며 친밀한 지내던 문학가 벨로리라는 '푸생의 생활태도와 사람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푸생은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다른 미술가에게서 볼 수 있는 불규칙한 생활이나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행동을 그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작업도 기분에 따라 제작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운동을 겸한 산책을 했는데 산책 코스는 때때로 시내의 번화가를 거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핀치오 언덕을 다녀오곤 했다.
그는 이 언덕에서 친구들과 만나 세상 이야기, 혹은 그림에 관한 이야기 등을 즐겁게 나눈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작업실로 들어가 점심때까지 작품을 제작한다. 점심 후에는 잠시 쉬었다가 몇 시간씩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푸생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작업했으며 저녁이 되면 항상 언덕에 올라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하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그는 이야기도 잘 했지만 남의 말을 듣는 진지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합리주의 정신을 가진 체로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구조적으로 화면에 옮긴 화가였다.
푸생은 그의 그림 안에서 지적 질서를 중요시해 항상 정연한 구성을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자신의 '구성한 자연이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은 깔끔하고 냉정한 면이 있다. 마치 카라바조의 '생동감'을 억제하고 차갑게 배제 시킨 것 같이 냉정하게 보인다.
잘 균형잡인 인체의 배열, 그리고 냉정하게 사용한 색상은 그의 이성적인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자.
신화적 주제로 감정을 냉정하게 절제시키고 합리적 공간 운용의 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대부분의 주제를 성서와 고대 그리스 신화 또는 서사시 등에서 선택한 후에 냉정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유지하며 다시 공간을 구성했다. 이러한 니콜라스 푸생의 작업태도는 소위 '아카데미 미술'로 굳게 자리를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