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박물관 및 미술 기행 61 / 내셔날 갤러리

by 한인신문 posted May 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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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의 대사들 3

장 드 댕드빌 대사는 그의 개인적인 종교적인 입장이 밝혀진 문헌이 없다. 그러나 옆에 있는 이 그림을 위해 런던으로 초대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25살의 조르주 드 셀브에 대해선 기록이 남아있다.
주교는 이 한 장의 그림을 위해 바쁜 일정 중에 런던까지 방문한 것은 두 사람의 사이가 보통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 주교는 이 그림의 모델이 되기 위해 장기간 체류했음이 틀림없다.
현직 주교가 과연 이 그림을 위해서 장기간 런던에 체류 했다는 사실에 우린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의 각별한 우정 때문인가?
아니면 무슨 다른 심각한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조르주 드 셀브는 후프랑스 라보르(Lavaur) 교구의 주교로 서품 된 인물로 가톨릭 교회에서 진보 세력이었다.
그는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원인이 교황이나 추기경 등 가톨릭 지도자들의 부패에 있다고 주장했다.
대사도 가톨릭교회 안에서 진보 세력 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단 종교적으로 진보주의자인 기울어진 한스 홀바인에게 이 초상화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홀바인은 1497년 독일 남부 국제 상업의 중심지 아우구스부르그에서 태어나 영국의 왕실화가를 지낸 16세기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1515년 18세의 나이에 스위스 바젤에 도착하여 1526년까지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한다.
당시 바젤은 새로운 미술과 종교의 도시로 각광을 받던 곳이다.
홀바인은 이곳에서 목판화 소묘가로서, 화려한 풍의 장식화가로서 처음에 인정을 받았다.
그는 예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성격묘사에 재능을 보여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작품을 의뢰 받았다. 그의 화풍은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무시하면서 디테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북유럽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었다.
홀바인이 주로 화가로 성장하고 활동한 스의스의 바젤은 프로텐스탄트의 도시였다.
1522년경 바젤에 들어온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뒤 4년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526년경 격렬한 성상파괴 폭동과 언론에 대한 엄격한 검열이 그 도시를 휩쓸었다.
그는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진보적인 신학자인 에라스므스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에라스므스는 예수의 소박한 가르침과 교황청의 화려함은 서로 모순된다고 성직자 들을 비판했다.
바젤이 신교를 받아들이며 교회 그림을 주고 그리던 미술가들이 일을 얻지 못했다.
이렇게 예술의 정체 현상을 초래한 상황에 직면해 홀바인은 1526년말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소개장을 갖고 바젤을 떠나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갔다.
그는 당시 28세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영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로는 정치가이며 작가인 토머스 모어 경을 위해 만든 것으로, 그 학자의 가족을 모델로 한 집단초상화 (원 작품은 없어지고 바젤 미술관에 그것의 모사품들과 예비 소묘가 보존되어 있음)와 이 인문주의자의 장엄한 개인초상화가 있다.
전자는 유럽 북부에서는 최초로 무릎을 꿇지 않은 인물을 그린 대형 집단초상화였는데, 그것의 효과는 불경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기보다는 모델들의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1528년 바젤로 돌아가 망설이다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로 종교화를 그리지 않고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로 활동했다.
이 같은 그의 태도로 보아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당연 의문이 발생한다.
알려진 바대로 프랑스 대사가 교황청의 입장을 받아들여 영국에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첫째로 대사와 주교 두 사람이 이미 알려진 대로 가톨릭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자였다면 종교적으로 강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 때에 이런 그림을 신교도인 홀바인에게 거액을 지불하고 결코 주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신교와 구교는 적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돈을 지불한 그들이 책 부분 속에 루터가 직접 가사를 쓴 찬송가를 집어 넣게 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화합과 조화를 상징하는 악기의 줄을 끊어버리는 그림을 그려 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 그림을 대사는 어떤 의도로 주문했는가?
먼저 한번 돌아봐야 하는 것이 당시의 국제 상황과 프랑스 왕의 입장이다.
구체적으로 다음 호에 이 당시 미묘한 국제적 대립 상황을 돌아보면서 대사의 의도를 깊이 들여다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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