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r) 의 대사들 5
대사와 주교는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주문했을까?
어떤 태도로 이들은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을까? 이들 표정은 아주 기쁜 표정은 아니다. 조금은 엄숙하고 다소 긴장감이 엿보인다.
옷차림을 보면 최대한 의식을 갖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사가 차고 있는 황금 목걸이는 생 미셀(Saint-Michel) 훈장으로 1469년 루이 11세가 제정한 이래 가장 명예로운 기사 훈장이다.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100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화려한 옷과 훈장으로 장식한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최대한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뎅드빌은 명문 귀족의 아들로 음악과 미술 그리고 과학 탐구를 좋아하는 휴매니스트였다. 그는 뿐만 아니라 그림 안에 자기의 나이를 묘사하고 있다.
대사의 나이는 그림(29 )속에 칼 자루에 적혀져 있고 주교의 나이는 오른 팔이 올려진 책의 모서리에 25이란 숫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 같은 나이를 직접 적어 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단지 자신의 나이를 밝히려고 한 것일까?
그러나 모자의 배지에 달려 있는 해골 문장과 그림의 전면에 그려진 해골, 그리고 숨겨진 십자가, 끊어진 악기는 무언가 중요한 결심과 중대한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아주 비중이 크게 그려진 두 개의 해골, 대사의 모자에 그려진 해골과 그리고 아랫부분에 대형으로 비틀리게 묘사된 해골은 이 그림 밑을 와인 잔을 들고 지나 갈 때 마치 모자의 배지가 와인 잔에 수평적으로 비추어 졌을 때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의 성장한 모습과 두 해골은 단순히 주교 친구와 만난 기쁨과 29살의 나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린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어떤 심정으로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도구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기구들을 보자. 휴대용 해시계, 놋쇠로 된 해시계, 양치기 목동이나 항해사들이 휴대 사분의(四分儀), 태양 빛의 각도 측정기 항해 시 고정된 별들의 위치 변화를 측정함으로써 항해하는 배의 위치를 계산하는 항해도구 토르케툼 등이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1533년 4월 11일 오전 10시 30분을 표기하고 있다.
왜 4월 11일 일까?
대사의 출생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두 사람이 무언가를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긴 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사의 생일은 9월 21일(1504년에 태어남)이다.
1533년 4월은 헨리 8세가 재혼을 하기 위해 교황청을 압박하고 있을 때였다. 헨리 8세는 신하를 유럽의 대학으로 보내 자기의 재혼에 대해서 여론을 수집하며 만약 교황이 허락을 하지 않으면 신교로 바꾸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 날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면 헨리 8세가 새 왕비인 앤(Anne Boleyn)을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기 이틀 전이다. (4월 13일 왕은 공식적으로 앤을 왕비로 선언함).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헨리 8세의 이혼과 결혼으로 영국 교회가 가톨릭으로 결국은 분열로 인한 종교개혁을 예견하고 이 같은 그림을 비장한 각오와 심정으로 주문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 같은 기회를 빌미로 교회 개혁을 꿈꾸고 있었던 진보주의자일 수도 있다. 로마 교황청에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신교도로 개종한 홀바인에게 결코 그림을 주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림의 내용 안에 신교도가 사용한 찬송가를 그려 넣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으로 가는 홀바인에게 소개장을 써준 사람은 가톨릭 교회에 강한 비판을 하던 에라스므스였고 대상은 '토마스 모어'경이었다.
그들은 아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개선을 위한 진보주의자로 끝내 가톨릭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가 교황청과 이혼 문제로 대립이 격화되자 대법관을 사임하고 다.
그는 영국의 성공회 창립에 반대하여 2년 후 1535년에 죽임을 당한다. 이들과도 신교도로 개종한 홀바인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의 처사에 반발을 하긴 했지만 그는 가톨릭 교회의 체제를 신교보다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교로 바꾸지 않고 가톨릭 교회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영국 성공회를 세운 것이다.
1533년 봄은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았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대사와 주교에게도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파리 의회의 의장의 아들이었던 셀브 주교는 뎅드빌 대사는 왕의 신임을 더욱 받았다.
주교는 33살에 병으로 요절하고 대사는 당시 평균 수명보다 더 오래 살고 51살에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