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9일 파리 살 플레이엘의 파리 관현악단의 음악회를 보기 위해 예약을 한 사람들은 한 가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원래 이날 예정되어 있던 지휘자는 에사-페카 살로넨이었다. 지난 해 파리 관현악단과의 성공적인 데뷔연주로 감동을 받은 많은 이들은 다시 그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이 음악회를 기다려 왔다. 하지만 연주 하루 전 살로넨의 건강의 악화로 이 무대의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연주회는 예정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며 지휘자는 다른 이로 대체되었다. 그 지휘자의 이름은 일란 볼코프 (Ilan Volkov), 이런 경우 선택은 2가지이다. 예약된 표를 환불 또는 다른 음악회로 변경하거나 아니면 그냥 연주회를 관람하는 것이다. 이 선택의 기준은 순전히 어느 지휘자가 대신 무대에 서느냐에 따른다. 당연히 유명한 지휘자가 대타로 왔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표를 바꾸지 않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지휘자일 경우 우리는 우선 그 지휘자에 대해 망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런..이 음악회는 순전히 살로넨을 보기 위해 예약한 것인데..”. 하지만 이 안타까운 일은 우리가 어쩌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역사적인 음악적 사건의 목격자가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물론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대가들이 다른 지휘자의 대타로 출현하여 ‘사건’을 일구어내고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경우를 우리는 보아왔다.
그 대표적인 지휘자는 전설적인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원래 첼리스트였던 그는 20세 때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 연주여행을 갔다가 극적으로 지휘자를 대신하여 베르디의 [아이다]를 지휘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또한 미국의 유명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도 뉴욕필의 보조 지휘자 시절, 상임이었던 브루노 발터의 병환으로 급히 대리를 받아 난곡으로 짜인 프로그램을 능란하게 지휘해 냄으로써 화려한 데뷔의 계기가 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재능 있는 무명의 지휘자들이 이런 식으로 세계무대에 알려지며 그 후 성공의 길로 들어서왔다. 하지만 반대로 대리지휘를 맡아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하면 관객의 냉혹한 시선에 무대를 떠나야 한다. 결국 필자는 이 젊은 지휘자 일란 볼코프의 재능에 기대를 가지며 음악회에 들어섰다. 예전 지휘계의 젊은 기대주로써 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의 연주를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76년 이스라엘 태생이며 19세에 뉴케슬 노던 심포니의 부지휘자, 1997년 런던 필하모닉 유스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1999년 보스톤 심포니의 보조지휘자로 세이지 오자와를 보필. 뉴욕 필, 보스턴 심포니, 런던 필, 예테보리 심포니,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NDR 심포니,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지휘. 현재 2003년 1월부터 BBC 스코티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활동 중이다. 그의 나이에 비해 화려한 경력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연주회장에 들어서자 아직은 많은 이들이 그의 대해서 낯설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거의 매진이었던 좌석에도 군데군데 비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연주가 시작되고 무대에 등장한 볼코프의 첫 인상은 약간은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안경을 쓴 단발머리에 수염까지 기른 모습에서 지휘자의 카리스마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시벨리우스의 "Finlandia", 바르톡의 "Le Mandarin Merveilleux", 그리고 베를리오즈의 "Romeo et Juliette" 하지만 연주회가 진행될수록 그의 지휘는 제자리를 찾는 듯 보였으며 오케스트라와의 호흡도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시큰둥한 반응은 공연이 끝난 후 열광적인 환호로 바뀌었다. 이번 연주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될만한 연주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파리관객들에게 일란 볼코프라는 젊은 지휘자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기회였음에 분명하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지휘자가 유럽의 중심무대인 파리의 살 플레이엘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