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04년 2월 폴란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베를린에서 체류중 2차대전동안 8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방문하고 싶었다. 베를린에서 독일철도 (도이체반)가 운영하는 기차를 타고 10시간 걸려 아우슈비츠인근의 고도시 크라카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반정도 가면 국경도시 오더강의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n der Oder)에 도착한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폴란드이다. 광활한 평야지대와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필자에게 강력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독일과 폴란드의 매우 상이한 경제발전단계였다. 독일이 첨단문명이라면 폴란드는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인 1960년대 초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 폴란드의 농촌과 도시모두 가난한 나라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들었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역과 집들, 도시를 지나도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즐비했다. 또 기차가 가다가 도중에 자주 멈추어서거나 속도를 늦추었다. 차장에게 문의해보니 폴란드 철도의 일부가 전기화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디젤로 연료를 전환하고 운전하느라 속도가 더디다는 답변을 얻었다. 폴란드 철도가 제대로 전기화가 되어 있더라면 베를린에서 크라카우시까지 10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폴란드의 국토는 31만평방km로 남북한을 합한 면적보다 약 10만평방km가 넓다. 반면에 인구는 3800만명 정도로 우리나라 (4800만명)보다 적다. 광활한 국토에 교육받은 인구를 지니었지만 폴란드의 경제는 그리 좋지 않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실업률이 18%를 넘고 있으며 인구의 17%가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열명 가운데 2명꼴에 매우 가난하다는 의미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 (구매력평가기준)은 1만3300달러에 불과하다.
폴란드는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에 가입하고 2004년 5월1일 유럽연합 (EU)의 회원국이 되었다. 당시 신규회원국이 된 10개 국가 –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발트 3국, 몰타, 키프로스 – 가운데 폴란드가 국토면적과 인구를 기준으로 최대 대국이다. 나머지 9개국은 인구가 불과 몇 백만명 혹은 몇 십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폴란드는 가입이후 대국에 적합한 대우를 요구했다.
유럽헌법조약 협상시 인구에 걸맞는 가중다수결 투표 (Qualified Majority Voting: QMV)권을 요구했다. 스페인과 연합해 주요 4개 회원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과 비교해 표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이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2월 집권한 레흐 카진스키 대통령과 총리인 야로슬라브 카진스키는 우파정당인 법과 정의당을 이끌고 있다. 유럽연합에 가입한 후 낙후된 지역이 많아 구조기금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유럽연합을 비판하는 등 인기영합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 최근 폴란드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중앙은행의 권한을 두고 또 다시 충돌했다.
폴란드정부는 연금과 증권, 은행분야를 통합감독하는 금융감독위원회를 서둘러 만들었다. 7명의 감독위원 가운데 6명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임명하고 중앙은행 총재가 나머지 1명의 감독위원이 된다. 문제는 이럴 경우 과연 금융감독위원회가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하는 문제이다.
폴란드가 이처럼 감독위원회를 서둘러 만든 것은 올 봄 중앙은행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폴란드 정부는 이탈리아의 금융그룹 ‘유니크레딧’이 소유한 자국은행인 BPH와 Pekao SA의 합병을 반대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합병을 승인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정부의 미움을 샀다. 이런 갈등 때문에 폴란드 정부가 중앙은행을 통제하기 위해 감독위원회 설립과 관련 법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사태를 파악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폴란드 정부에게 강력한 경고장을 보냈다. 찰리 맥크리비 단일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폴란드 재무장관에게 통합 감독위원회 설립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하며 정부의 재정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릴 것이라며 경고했다. 이어 맥크리비 위원은 폴란드 정부에게 금융감독기관이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국제적 기준에 적합하도록 노력해 달라고 요구했다.
만약에 폴란드 정부가 현재대로 금융감독시스템을 운영할 경우 여러가지 어려움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단일화폐, 유로화에 가입하려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법안을 제정해야 한다. 독일이 마르크화를 포기하는 대가로 독립적인 유럽중앙은행과 각 국의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요구했다. 폴란드 정부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것은 유로화 가입을 서두르지 않고 있으며 유럽연합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정부 재정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상황에 맞게 경제정책을 구사하겠다는 의도이다.
유럽연합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회원국 모두가 지켜야 할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려는 일방주의 외교정책을 이행하겠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래저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다른 회원국들은 폴란드 때문에 골치 아프게 생겼다.
안병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