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시내 중심가에 유럽연합(EU) 기구인 유럽법원(유럽사법재판소, European Court of Justice)이 있다. 일반인들에게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법원이지만 유럽통합사에서 종종 획기적인 판결로 통합을 앞당긴 역할을 수행했다.
지난달 23일 유럽법원이 내린 ‘폴크스바겐법’ 위법 판결도 이런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원래 EU는 상품과 서비스, 노동과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27개 회원국들은 자국법의 교묘한 조항이나 상이한 품질관리 등 각 종 비관세장벽(NTBs)을 동원해 단일시장의 형성을 막아왔다.
독일정부는 폴크스바겐 자동차를 적대적인 인수합병으로부터 막기위해 이 법으로 아무리 많은 지분을 보유한 주주라도 20%이상의 의결권 행사를 금지했다. 보통 51%의 지분을 보유하면 대주주가 되고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폴크스바겐법은 아무리 많은 지분을 보유해도 20%의 의결권만을 행사하게 했다. 따라서 ‘폴크스바겐법’이라고 불리었으며 지난 1960년부터 이 법이 효력을 발휘해왔다. 유럽법원은 이런 규정이 자본의 자유이동을 저해해 EU 회원국내 단일시장 형성을 막고 있다며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EU는 각 종 조약과 규정, 지침 등을 통해 단일시장 형성을 추진해왔다.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출범시킨 로마조약, 1992년까지 단일시장을 형성하자며 1987년에 발효된 단일유럽의정서(SEA), 단일통화를 출범시킨 유럽연합조약(1993년)등에서 단일시장 형성을 위한 여러 가지 조항이 들어있었다. 자본의 자유이동은 1958년 로마조약에서부터 규정이 있었으나 회원국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1987년 발효된 단일유럽의정서에서 일부 언급이 된 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왔다.
집행위원회와 법원의 상호협조
이번 폴크스바겐법 폐지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이다. 집행위원회는 각 회원국이 조약과 규정, 지침 등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감시한다. 만약에 한 회원국이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고 판단되면 해당 회원국에 서면 경고장을 보내 해명을 요구한다. 이 단계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집행위원회는 최후의 수단으로 회원국을 유럽법원에 제소한다. 폴크스바겐법 관련해서도 집행위원회는 이런 절차를 따랐다.
과연 법원이 무슨 판결을 내릴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었는데 법원은 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서 이번에도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폴크스바겐법을 당시 독일의 특수한 상황만 이야기하며 폐기하지 않는 독일정부에 집행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일침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럽연합 기구들은 개별 국가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 이익을 대변해 활동해왔으며 이번에도 집행위원회와 유럽법원이 독일 정부를 뒤흔드는 큰 펀치를 날렸다.
요정의 나라 룩셈부르크에 있는 힘없는 기관?
혹자는 유럽법원을 룩셈부르크라는 소국에 있는 힘없는 기관으로 폄하하곤 했다. 그러나 이는 통합과정에서 유럽법원이 수행한 역할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1962년 유럽법원은 Van Gend En Loos라는 유명한 판례를 통해 회원국끼리 체결한 조약이 법인(legal person)에도 효력을 발생한다고 판시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화학약품 수입업체 Van Gend En Loos는 벨기에로부터 화학약품을 수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가 이 화학약품의 상품분류를 변경하는 바람에 이 업체는 이전보다 더 높은 수입관세를 지불해야만 했다.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는 관세동맹 형성을 위해 회원국끼리 각 종 관세를 인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전보다 더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 EEC 설립조약인 로마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소자인 네덜란드 정부뿐만 아니라 벨기에, 독일 정부까지 나서 이 조약은 어디까지나 회원국에게만 적용되지 법인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법원은 회원국들이 새로운 법질서를 창조하고 주권의 일부를 초국가기구에 넘겼기 때문에 법인들에게 조약이 적용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기존의 국제법 질서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인 판결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판결을 통해 유럽법원은 유럽통합에서 대부분 초국가적인 방향으로 통합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원래 각 회원국 대표들은 공동체 기구를 만들 때 유럽법원이 이 정도로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회원국을 압박할 수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회원국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유럽법원은 통합과정에서 핵심역할을 수행하며 통합을 앞당겨왔다.
안병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