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경제협력 제대로 될까?
1200억달러 위기기금 마련..,감독기구 운영과 일본과 중국의 라이벌 의식 등 과제 남아
지난 3일 인도네시아 휴양도시 발리(Bali)에서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과 한중일 3개국(합쳐 아세안+쓰리)은 1200억달러 규모의 위기펀드(emergency fund) 조성에 합의했다. 로이터 통신과 블룸버그, 뉴욕타임스 등 각 국 매체는 ‘아시아 자립의 단초’라며 이 소식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특히 로이터 통신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미국 등 서구국가의 버림에 쓰디씀을 느꼈던 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에 의한 아시아를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며 이 기금조성을 평가했다. 반면에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소식을 일본 중심으로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즉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 모임에서 경제위기에 처한 아세안 국가들을 위해 1000억달러를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자금 규모도 엄청나고 위기펀드 조성에서 중국과 일본의 라이벌 의식과 함께 갈등도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에 아시아 경제협력을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소재를 제공했다.
왜 유럽은 되는데 아시아는 안되는가?
유럽통합을 전공한 필자가 일반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가장 많이 질문을 받는 것이 ‘왜 유럽은 통합이 진전되었는데 아시아는 지리멸멸한가?’하는 점이다. 유럽이 통합을 시작해 국제무대에서 발언권도 높이고 세계 최대의 단일시장도 이룩하고 무엇보다도 유럽국가간에 평화를 구축했다. 유럽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계 역사의 주역이었으나 1, 2차 대전이라는 유럽국가 간의 내전(civil war)을 겪으면서 국제무대에서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런 유럽이 50년넘게 통합을 진전시키면서 단일화폐도 사용하고 국제정치에서 외교와 국방의 문제에서도 발언권을 높여왔다. 반면에 아시아는?
통합(integration)을 국민국가가 보유한 주권을 초국가기구((supranational institution) 에 이양하는 과정이라고 할 때 아시아에는 초국가기구가 없다. 즉 회원국으로부터 통상정책이나 경제정책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기구가 없다. 아세안은 소규모의 회원국이 있는데 회원국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회원국에서 파견된 사람이며 사무국은 심부름 역할을 할 뿐이다. 아직도 아세안은 단일시장도 아니고 더구나 단일화폐는 너무나 요원한다. 한중일 3국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직 중국과 우리나라간에는 FTA 협상도 개시되지 않았고 한일 FTA는 협상을 시작했지만 중단된 지 오래다.
이렇게 유럽과 아시아는 통합을 비교할 때 너무나 차이가 나고 유럽통합의 관점에서 아시아 지역통합이나 협력을 볼 때 크게 뒤쳐져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미국의 정치학자 피터 카젠스타인(Peter Katzenstein)은 “지역은 지리적으로 주어지지만 정치적으로 만들어진다”라며 각 지역의 지역주의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유럽을 기준으로 절대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각 지역마다 지역을 구성하는 국가 지도자들이 정치적 의지를 갖고 지역협력과 통합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1200억 긴급펀드는 이전의 금융협력과 무엇이 다르고 과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양자간 통화스와프 다자화에 성공...중국과 일본의 갈등은 지속될 듯
우선 이번의 합의는 1200억달러 기금을 다자화(multilateralization)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2000년 5월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합의한 395억달러의 기금은 양자간 통화스와프였다. ‘치앙마이 이니시어티브’(Chiang Mai Initiative)는 우리나라와 일본, 일본과 중국, 아세안 국가들과 아세안 국가들 혹은 중국과 일본 등 2개국이 서로 합의한 통화로 긴급자금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 성격이었다. 양자간 합의였기 때문에 곤경에 처한 국가들이 자금을 빌리려해도 합의한 국가로부터 합의한 규모만큼만 빌릴 수 있었다. 실효성 면에서 매우 미미했다. 반면에 이번 합의는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3개국 등 13개 나라가 395억달러 기금을 1200억달러로 확대하면서 이 기금을 다자화했다. 13개 나라가 출자한 액수의 일정 비율만큼 달러를 빌려다 쓸 수 있기 때문에 아시아판 통화기금(Asian Monetary Fund)에 비유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회원국의 납임금을 기준으로 국제수지 위기에 처한 회원국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왜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때에는 이런 다자기금이 합의되지 못했고 이번에 합의되었을까? 이런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과 일본, 미국이라는 주요 변수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97년 경제위기때 중국의 경제력은 그리 크지 못했다. 또 외환보유고도 현재의 2조달러에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은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직전에 미아쟈와 이니시어티브(Miyazawa Initiative)라는 아시아판통화기금 창설을 제의했지만 미국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이런 의도를 IMF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상당한 압력을 넣어 이런 제의를 무산시켰다. 로렌스 서머스가 현 미 대통령 직속 경제자문위원회(Council of Economic Advisors) 위원장이 당시 재무 부장관으로 이런 압력행사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번에는 중국의 부상과 경제력이 1200억달러 합의에 크게 기여했다. 1200억 가운데 중국과 일본은 각각 384억달러, 우리나라는 절반인 192억달러 출연에 합의, 3개국이 모두 960억달러, 전체 기금의 80%를 납부한다. 나머지는 10개 아세안 회원국들이 분납한다. 여기에서 중국은 외환보유고가 일본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일본보다 더 많은 돈을 내겠다고 나섰다. 일본은 경제력에서도 중국에 밀린다는 것을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로 보고 중국과 같은 액수를 나겠다고 서로 우겼고 결국 같은 액수 납부에 합의했다. 서로 돈을 내겠다고 나섰으니 좋은 일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뿌리깊은 라이벌의식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런 라이벌 의식이 기금의 대폭 확대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앞으로 이 기금의 운영에서 일본과 중국이라는 2대 ‘물주’(pay-master)가 의견충돌을 빚을 때 해법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중국은 두툼한 돈 주머니를 쥐고 아세안 10개 회원국들에게 ‘큰 형님’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가 대화를 나눈 한국의 한 외교관은 “아세안 국가들이 지역협력에서 자신들이 운전수라고 우기지만 실제 운전수는 중국같다”는 말을 했다.
1200억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운영하는데 감독기구가 필요하다. 누가 감독기구의 장이 되며 어떻게 기금운영을 감독할지 이런 사항을 하나하나 정하고 실제 적용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번 기금의 합의에 미국은 반대하지 않았다. 미국이 경제위기 대처에 겨를이 없으며 아시아 국가들의 자조노력이 미국의 국익에도 배치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앞으로 1200억달 기금운영에서 중국과 일본의 협력과 갈등, 이 사이에서 우리나라의 역할, 미국의 입장 등이 아시아 금융협력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지을 것이다.
안 병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