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주부라는 낙인
현모양처에서 이제는 ‘낙인’까지?
1980년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할 때 필자는 국민총생산(Gross National Product: GNP)개념관련 강의를 흥미있게 들었다. GNP에 포함되려면 재화나 서비스나 모두 시장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속칭 지하경제는 세금을 내지 않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경제활동을 통칭하는데 국가별로 지하경제 규모가 천차만별이다.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은 매우 필요하다. 가사노동은 지하경제가 아니지만 시장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GNP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 착안해 1980년대 당시 국내의 몇몇 경제학과 교수들은 가사노동의 가치를 계산해 월 100만원, 150만원 등으로 산출해 발표했다. 요즘도 가끔 이런 보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변해 이제 선진국 혹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정주부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최근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지는 세계 각 국에서 가정주부에 대해 낙인을 찍고 있다며 이를 분석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가정주부는 낭만적인 개념도, 낙인을 찍을 대상도 아니다”
일단 전업주부라고 대답하면 남편이 부자이기 때문에 집에서 아이들을 키워도 될 정도의 경제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능력이 떨어지거나 게으른 사람이라도 부정적인 의미도 일부 포함되는 정도에 이르렀다.
국내의 경우를 보자. 신혼부부들이 서울에서 살려면 남편 혼자 벌어서 사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학교까지 들어가면 막대한 사교육비 때문에 맞벌이의 필요성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혼여성들이 아이들까지 부양하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기는 쉬운일이 아니다. 흔히 ‘슈퍼우먼’(superwoman)이라고 하는데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충실한 그런 여성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슈퍼우먼은 이상일 뿐이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심각해지지만 탁아시설 등이 부족한 현실에서 아무리 능력있는 여성이라도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지 못해 중도에 직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흔하다.
독일 여성은 보통 ‘3K'라고 불린다. 부엌(Kueche), 탁아소(Kindergarten), 어린이(Kinder)인데 그만큼 가정에 얽매여 있다는 말이다. 독일 초등학교 상당수가 보통 점심 때에 끝나고 3살 이하의 어린아이용 탁아소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매우 적다. 이 때문에 독일 기혼여성들은 가정주부라고 떳떳이 말하기 보다 보통 출산휴가중이라는 에둘러 대답하기도 한다고 IHT 칼럼은 지적한다.
반면에 노르웨이나 스웨덴 등 북구 국가들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매우 높다. 출산휴가를 부부가 나누어 사용할 수 있고 출산휴가 중의 급여도 현직에 있을 때와 비교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 또 북구 국가에서는 아이들을 탁아소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키우는 부모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기도 하는데 일부에서는 이런 조치를 비판하기도 한다. 보통 노동자나 이민가정의 부모들이 이런 수당을 많이 받는데 사회성을 키우고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의 경우 공용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혼 여성이 일을 하고 싶어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일하는 게 필요해서 일한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사회가 급속하게 변하면서 가정주부는 점차 사회적 규범에 적합하지 않는 다는 식으로 인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기도 하며 이런 과정의 와중에 가정주부라는 낙인이 굴레처럼 작용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가정주부가 육아와 가정을 위해 하는 귀중한 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점이다. 많은 연구결과에서 나왔듯이 태어나서 3살까지 아이들 성격이 상당부분 형성된다는데 이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접촉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데도 GNP라는 경제적 개념만 가지고 가사노동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안 병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