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너무나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오늘 내게 일어난 너무나 속상한 사건으로 인해 사실 원래 쓰려던 주제로 글을 쓸 자신이 없어 이 공간을 통해 하소연 겸 나름대로 느낀 것들을 풀어보려 한다.
혹시 나처럼 속상한 일 있으신 분들은 나름대로 함께 다독이며 위로도 할 겸. ‘잃어버린 것들’, 제목은 마치 심오한 뜻을 품은 듯 하나 사실 말 그대로 어이없게 무언가를 잃어버린, 어쩌면 살면서 가장 비싼 물건을 잃어버린 기념비적인 날이 바로 오늘이다.
여느 유학생처럼 필자에게도 중요 재산 목록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트북이었다. 특히나 글과 음악을 주무기(?)로 삼는 필자의 노트북에는 그간 수집해온 방대한 양의 음악들과 내일까지 마감이라 완성해 놓은 글을 비롯한 많은 글들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지난 영국생활의 흔적들, 곳곳에서 벌인 음악활동의 발자취가 담긴 사진들 까지.
노트북을 들고 외출하는 게 일년에 한 다섯 번쯤 될까? 오늘이 그 다섯 번 중 하루였다.
간단히 점심을 먹으며 글을 쓸 요량으로 버거킹에 들렀다. 햄버거를 받아 들고 테이블에 앉은 뒤 노트북이 든 가방을(노트북 전용 가방이 아닌 그냥 백팩) 내가 앉은 의자 오른쪽 밑에 놔두고 열심히 햄버거를 음미하던 중 웬 시커멓게 입은 두 녀석이 내 뒷테이블로 와서 앉아서 뭘 먹는 듯 하다 금방 자리를 떴는데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햄버거를 먹다 문득 의자 밑을 봤더니 웬걸, 가방이 마술처럼 사라진 게 아닌가?
나름대로 꼼꼼해서 살면서 뭘 잃어버린 경험이 별로 없었는데, 정말 정신이 아찔했다. 당연히 내 뒷테이블에 앉았던 두 놈의 소행인데 어떻게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정신을 가다듬고 카운터를 보니 CCTV가 두 대나 설치가 되어있었다.
얼른 메니저를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CCTV의 도움을 빌리고자 했더니 너무도 얄밉게도 두 대 모두 폼으로 있는 거지 실제 작동은 안 한다고 한다.
버거킹에서는 별 도움을 못 받을 것 같아 밖으로 뛰쳐나와서 두리번거리다 문득 일단 경찰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 근처에 있는 경찰서에 들어가 설명을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시커멓게 입은 젊은 두 놈이라는 것 외에는 그 놈들의 인상착의를, 백인인지 흑인인지 조차도 유심히 보지 않았기에 도무지 기억을 해낼 수가 없었다.
경찰 말로는 거의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한다. 노트북 안에 있는 자료가 내게는 얼마나 중요한지 알 턱이 없는 그들, 근처 튜브역에 가서 역에 설치된 CCTV를 볼 수 있냐고 했더니 경찰이 직접 와서 요청하지 않는 한 일반인은 의뢰해도 소용 없단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CCTV를 보유하면 뭐하나,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도대체 허름해 보이는 내 가방에 노트북이 들어 있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이놈들이 내 가방을 투시했을 리도 없고, 정말 운 좋은 놈들이다.
뜻밖의 횡재에 혹시 어디서 술이나 한 잔 하고 있진 않을까 해서 근처 펍들을 형사 같은 눈으로 샅샅이 뒤지고 다녔건만 런던 시내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들을 찾기란 미션 임파서블 이었다.
그리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글이야 다시 쓰면 되고 음악이야 다시 구하면 되겠지만 그 동안의 삶을 기록해 놓은 사진들은 절대로 다시 찾지 못할거란 생각에 어찌나 안타까운지, 그런데 갑자기 그 사진 속의 내 모습이 아니라 나와 함께한 사람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진들이 소중했던 건 아마도 그들과 함께한 순간이었기 때문일 텐데. 마치 없어진 사진처럼 그들이 내 삶에서 영원히 없어진다는 상상을 해보니 너무도 끔찍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잃어버린 것은 사진 뿐, 그들은 내 곁에 있었다.
서른 남짓 살아온 인생의 기록, 아니 칠팔십 세의 인생을 기록한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기록일 뿐, 하나의 사물일 뿐, 어찌 내 곁의 한 사람과 비할 수 있을까?
다행이다, 너무나 다행이다.
물건을 도둑맞아서, 나를 절대로 사랑해 줄 수 없는 물건을 도둑맞아서, 나를 너무나 사랑해주는 사람을 도둑맞지 않아서.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 중 아마도 나는 오늘 가장 비싼 물건을 잃어버린 것 같다.
속상하다.
그런데 내 곁에는 그보다 더 소중한 수많은 사람, 수많은 추억, 수많은 꿈들이 여전히 내게 미소 짓고 있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