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내리던 날

by 유로저널 posted Jan 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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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함께 사는 사람들의 기쁜 외침에 잠을 설치며 바라본 창 밖은 런던에서 처음 보는 하얀 풍경이었다. 첫 눈이 온 것이다. 전에 잠깐이라도 눈발이 날린 날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게는 올 겨울의 첫 눈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 눈일지도. 한국에 있을 때 스티븐 스필버그의 ‘후크’ 같이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 예쁜 런던의 거리에 하얀 눈이 내리는 장면들이 있어서 실제 런던에서도 눈 구경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런던은 눈 구경하기 힘들기로 유명한 곳이란다. 어쨌든, 정말 오랜만에 만난 하얀 풍경, 그런데 이상하게 그 언젠가 첫 눈을 맞으며 설레이던 그 감격이 예전만 못한 것 같았다. 유난히도 눈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눈 많이 온다는 이유로 스코틀랜드에서 살려고 작정까지 했었는데, 이제는 첫 눈의 설레임으로 감동하기엔 마음에 너무 세상 때가 묻었는지, 정녕 어른이 되어버린 것인지. 하얀 눈의 설레임을 되찾고 싶어 30년 남짓한 지난 기억의 책장을 뒤적이며 하얀 눈이 내린 페이지들을 펼쳐본다.

내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눈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어머니의 오래된 일기장을 통해 증명되었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우연히 어머니의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해서 몰래 읽어본 적이 있다. 그 가운데 네 살이었던 내가 어머니와 함께 그 당시 살던 연립주택 마당에서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너무나 좋아하더라는 기록이 있었다. ‘눈을 자꾸 비라고 하는 성민이’라는 그 일기 속의 구절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리고 문장마다 느껴지는, 어린 아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사랑도.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바라본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은 아마도 그 어린 꼬마에게는 더없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마법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지내던 유년시절,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밤에 혼자 눈덩이를 굴리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려 결국 집 앞까지 가져오길 포기하고 아쉽게 버려두고 왔던 기억도.

사춘기가 되고 이성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눈이 오면 함께 손을 잡고 눈 속을 거니는 영화의 한 장면을 함께 재연할 수 있는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유난히 강했던 것 같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첫 여자친구를 만난 스무 살의 어느 겨울날 첫눈이 펑펑 내리던 이른 새벽 그녀의 집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찾아갔는데 살짝 늦잠을 잔 그녀는 약속시간 보다 늦게 나왔고,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채 가시지 않은 어둠 속에서 눈 쌓인 그녀의 집 앞 땅 위에 발자국으로 그녀의 이름을 크게 써보았다, 눈 위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행복해할 그녀를 상상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고 닭살 돋는 일이지만 그 풋풋했던 첫 사랑의 추억에 슬며시 미소 지어본다. 그렇게도 애틋했던 첫 사랑이건만 역시나 첫 사랑답게 이루어지지 않고 이별의 순서를 밟게 되었을 때도 추운 겨울이었고 늦은 밤 신촌에서 혼자 버스를 기다리는데 펑펑 내리던 쓸쓸한 눈, 주위를 둘러 보면 팔짱을 끼고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들의 모습만 보이던 날, 그들의 행복을 더욱 로맨틱하게 해주었을 그 하얀 눈이 어찌나 얄밉도록 느껴지던지.

1999년 2월 4일, 충청남도 공주의 32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하던 날 하얀 눈발이 정신 없이 흩날렸다. 안 그래도 추운 겨울 입대하는 기분이 영 내키지 않았는데 하필 눈까지 내리다니. 위병소 앞에서 군악대가 ‘소양강 처녀’를 연주하는데 나는 노래방에서 흥을 돋구던 그 뽕짝이 그렇게 슬프고 비장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새벽부터 내 손을 붙잡고 눈물로 기도해주신 어머니를 뒤로하고 아버지와 단 둘이 나선 길, ‘이제 훈련병들은 부대 안으로 들어오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에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시던 아버지의 눈가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내심 염려가 되셨던 걸까, 난 더 당당해 보이려고 일부러 어깨를 쭉 펴고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부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때 내 뺨을 때리던 차가운 눈의 감촉이 지금도 기억난다.

만져보면 차가운 눈, 하얀 색도 사실은 차가움을 전달하는 색임에도 그 하얀 눈과 함께한 그리운 기억들이 유난히도 가슴 시리게 떠오를 때면 그 하얀 눈이 너무도 따스하게만 느껴진다. 저마다의 기억 어디 쯤엔가 곱게 간직되어 있을 첫눈이 내린 그 하얀 풍경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며 그리움을 따라 떠나는 여행길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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