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향기가 건네는 노래 – 셋

by 유로저널 posted Mar 1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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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던 음악이 세상 바깥으로 나올 때부터 그 음악은 더욱 가치가 더해지고 음악적으로도 성장하는 것 같다. 내 소리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또 다른 소리들과 어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배우면서 더욱 객관적으로 자신의 소리를 점검하며 개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피아노를 비롯한 음악팀과 함께 반주를 시작하면서 한 번도 말도 걸어보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어쩌면 평소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던 성격이 그 시절 교회에서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고쳐졌던 것 같다. 지금은 소위 말하는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눈부신 성장과 뛰어난 뮤지션들이 교회에도 다수 존재함에 따라 기독교 음악이 질적으로 세상의 일반 음악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지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기독교 음악은 세상의 일반 음악에 비하면 그다지 뛰어날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의 음악은 단순히 감성과 연계된 음악 자체의 고유함을 떠나 한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음악 안에서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전달되는 무한한 평화와 희열이 있다. 훗날, 통기타 라이브 업소를 비롯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는 경험도 해봤지만 결국 음악인 자신에게나 음악을 향유하는 타인들에게도 가장 힘이 있고 가치가 있는 음악은 하나님을 높이고 타인의 영혼에 진정한 사랑과 위로, 휴식을 전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개인적인 결론이다. 또한, 그 때까지도 신앙생활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던 차, 기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성경 말씀을 듣는 자리에, 기도하는 자리에 점점 많이 참여하게 되고, 신앙 뿐만 아니라 인격까지 바르게 갖춘 훌륭한 신앙인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삶 전반에 걸친 좋은 변화를 많이 맞이하게 된 것 같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대학교 2학년 무렵에는 단순한 반주자가 아닌, 노래도 같이 부르면서 교회 음악팀을 이끄는 일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책 한 권 쓸 만큼의 구구절절한 군대 이야기를 갖고 있겠지만 필자 역시 마찬가지로 참 특별한 군 생활을 했다. 그리고 역시 그 중심에는 기타가 함께 했다. 훈련소 시절에도 자기 소개서에 기타 언급을 했다가 조교 내무반에 불려가서 당시 대학 가요제의 꿈을 품고 있었던 담당 조교에게 기타도 가르쳐 주고 작곡도 해주게 된 것. 물론, 바쁜 일정 탓에 정규 기타 수업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그로 인해 유독 훈련병에게 혹독하던 그 조교의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훈련소를 퇴소하던 날 먼 부대로 배치를 받아 자대에서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며 어느덧 밤이 되고 여전히 강당에 집합해 있던 중 노래 한 곡 불러달라는 조교의 부탁으로 남은 훈련병들을 위해 조하문의 ‘이 밤을 다시 한번’을 부르던 일이 생각난다.

그렇게 배치된 부대는 전라도 광주에 사단 본부가 있는 31사단, 그리고 필자가 근무한 곳은 전남 순천에 위치한 95연대 본부였다. 원래는 남쪽 끝 고흥에 해안경비대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교회일을 맡고 싶다는 필자의 강력한 요청으로 본부의 군종병 겸 정훈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정훈병은 부대 방송 및 신문을 만들고, 대외 홍보를 비롯 부대장 훈시문도 작성하는 등 그야말로 지금 필자가 공부하고 있는 저널리즘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몰두했던 글쓰기가 오늘 이순간까지 이어져올 줄이야…

어쨌든, 문제는 필자 이전에 교회일을 담당하던 군종병이 워낙 사람들의 비호감을 샀던 탓에 당시 우리 부대 내에서는 교회, 기독교인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이 있었고, 당연히 이등병 군종병인 필자에게 가해진 일들은 정말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나 싶을 만큼 끔찍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군종병이었기에 이등병 시절부터 만질 수 있었던 (원래는 병장급이 되야 기타를 만질 수 있었다, 그 밑으로 기타 만졌다간 큰일난다) 기타가 함께 있었다. 틈날 때마다 조그만 부대 교회에서 기타를 치면 언제나 그렇듯 나만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며 모든 고통과 외로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 시절 좋은 노래들을 많이 만들 수 있었고, 입대 전 해오던 찬양인도에도 기타가 너무나 요긴하게 쓰였음은 당연하다. 긴 시간의 고통이 벅찬 기쁨으로 돌아온 것은 필자가 상병으로 진급하고, 부대장으로 당시 동티모르 파견대장 이셨던,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박인철 대령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안팎으로 활동에 힘과 자유가 실리면서 군대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창조적인 일들을 벌여 나갔다. 마침, 내 밑으로 들어온, 그러나 나이는 형님뻘인 두 명의 전도사님들도 엄청난 힘이 됐다. 우리는 부대 내에서 음악하는 병사들을 모아 팀을 만들어서 부대 바깥의 일반 교회들로 순회 공연을 나섰다. 성악, 색소폰 등등 다양한 순서로 이루어진, 흔히 보기 힘든 군인들의 공연이었고 지역 교회들은 그런 우리들을 큰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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