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낮디 낮은 자리에 있어도 속된 표현으로 하나도 꿀리지 않던.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꿈과 그 꿈을 향한 열정과 도전정신, 진정으로 지켜져야 하는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자부심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간혹 주위에, 특히 비슷한 또래의 그 누군가가 본인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많은 것을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면,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그렇게 대가 없이 주어진 것들로 나약한 의지와 흐릿한 꿈을 애써 가리고 있는 모습에 동정심마저 들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얼마나 쉽게 얻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얼마나 열심으로 살아가고, 또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느냐가 진정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철없던 시절이었지만, 마음 만큼은 최고로 부유했던 시절…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진짜 세상을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것은 진짜 세상의 아주 작은 구역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만 세상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는 참 커다란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은 다름아닌 ‘돈’이었다. 내 능력과 내 노력으로 한 푼의 돈을 번다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 줄 이전까지는 정말 몰랐던 것 같다. 대학에 채 입학하기도 전에 술집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서 당시로서는 큰 돈을 쉽게 손에 쥐었건만, 슬슬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하게 되니 정말 ‘돈’이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언젠가 군복무 시절 휴가 때 아버지가 소주잔을 채워주면서 건네던 말씀, “세상은 결코 쉽지 않다, 어느 누구도 가족처럼 너를 아끼고, 너를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부딪혀야 할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 부모님께서 선뜻 주셨을 용돈 만원,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그 만원을 벌기 위해서는… 최대한 나를 팔아야 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발휘해야 했고, 때로는 내가 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자존심도 버려야 했다. 결코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자격을 갖추지 않았던 까닭에 슬그머니 ‘과연 내가 무엇으로 어떻게 이 세상에서 먹고 살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어렸고, 젊음과 열정,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또 아직은 세상에 모르는 것이 더 많았기에 아마도 그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으리라.
세월이 더 흘러서 이제 어느 정도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스스로도 부끄럽게 여겨야 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 해서 될 일과, 해도 안 되는 일들에 대한 스스로의 한계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고, 세상을 알면 알수록 쉽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만큼 남들이 가진 것들에 눈길이 갔다. ‘인생은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인생은 재능 곱하기 노력’ 또는 ‘돈이 돈을 번다, 그래서 처음부터 없는 놈은 처음부터 가진 놈을 능가하지 못한다’라는 혐오스러운 말들이 더 공감이 갔다. 사람이란 그토록 간사한 동물인 것인지… 이미 부모로부터 물려 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재산이 너무 풍족해서 절대로 멀고 살 걱정을 안 해도 될 것처럼 보이는 또래 사람을 만나면 정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어리석은 불평을 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일자리를 얻고 장기 거주를 희망하다 보니 이곳에서 안정적인 체류 신분을 가진 이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뭐를 좀 해보려고 해도 국제학생 신분으로는 너무나 제약이 크고 높았다. 그러다 보니 슬그머니 비슷한 또래인데 영주권자나 체류에 문제가 없는 이들을 볼 때면, 특히나 그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 그러한 환경을 타고난 것이라는 생각에 속이 부글거리기도 했다. ‘내가 그들과 같은 조건이었다면 나는 더 잘했을 텐데’하는 우습고도 교만한 착각과 함께.
이렇게 부끄럽고 어리석은 인간의 심리가 비단 필자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만약 대다수가 필자의 글을 읽고 ‘난 안 그런데’라고 한다면 그저 필자로서는 더욱 반성하고, 더욱 인격 수양을 해야 할 일이다. 한동안 위와 같은 어리석은 비교, 질투, 원망, 불평에 사로잡히다 보니 소중한 내 영혼이 병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가진들, 진정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얻었느냐가 아닐까? 좋은 환경을 타고난들, 그것이 인생 전체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작은 것을 얻어도 그것을 얻기 위해 헌신한 의지, 노력, 열정, 꿈,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결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 아닐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런 얘기들을 굳이 이렇게 글로 담아내며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걸 보면 요즘 정말 세상 깊숙이 들어가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