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년 가까이를 절친하게 지내는 여자 후배가 하나 있다. 일산에서 알아주는 명문고 출신인 이 여자 후배는 흔치 않게도 이과 출신이었고, 수학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반면, 대학에 입학하고서 조차도 영어를 참 체질적으로 싫어했었다, 마치 필자가 체질적으로 수학을 싫어하듯. 그러던 후배는 작년 부터 자신이 번 돈으로 유럽, 호주 등으로 배낭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더니 어느날 필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영어를 잘 할 수 있고, 즐거워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전해왔다. 여행지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보니 진짜로 외국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여행을 즐기고 있는 후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초중고 영어 교육, 수능 영어, 토익 등 영어의 홍수 속에서도 영어에 대한 재능, 영어에 대한 편안함과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해 어쩌면 평생 영어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을 후배는 그렇게 여행 몇 번으로 영어와 친구가 되어 버렸다.
군 시절의 일이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필자 역시 병장이 되고 나서는 내부만에서 영어 책도 펴놓고, 사전도 뒤적이면서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 동안 굳어진 머리에 염려도 되고, 더군다나 영어가 전공인 필자로서는 사회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들 가운데 영어 공부가 빠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무반에서 영어 공부를 하던 도중 후임병 하나가 필자에게 말을 건네왔다. “전성민 병장님, 영어 공부 뭐하러 하십니까?” 별 것 아닌 질문인데 대답하기가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나온 대답은 “영어 못하면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잖냐.” 그랬더니 그 후임병이 하는 말이, “에이, 저는 평생 영어 전혀 못해도 즐겁게, 돈 잘 벌고 살 자신 있습니다.” 그 후임병은 아버지와 함께 돼지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훗날 농장을 물려받아 가업으로 이어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 돼지만 건강하게 잘 키우면 평생 영어 사용할 일 없이, 즐겁게, 또 돈도 벌면서 충분히 살 수 있는 삶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 후임병과 대화를 나누면서 평생 영어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이나 스트레스도 없이 살아왔고, 아마도 살아갈 그 후임병이 슬며시 부러워졌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가 공개한 영어 교육 개선 방안을 놓고 한국이 또 다시 시끄럽다. 국어, 국사와 같은 일반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며, 학교에서 영어 과목을 폐지하고 ‘학생용 토익’을 도입하겠다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까닭에, 영어라면 목숨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학생, 학부모, 학교, 교사, 학원 등 우리 시대 영어의 노예들로서는 빅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이,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영어, 영어교육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지라, 굳이 필자가 아니더라도 수 많은 전문가들이 다양하고 방대한 의견을 쏟아내겠지만, 그래도 감히 이 문제에 대해 몇 마디 나눠보고자 한다. 필자는 한국의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미국의 보스톤에서 어학 연수를 했으며, 영국에서 언론 석사를 했다. 유치원생부터 삼수생까지, 초등 회화부터 수능, 토플까지 참 다양한 강의를 경험했다. 어쨌든 영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그로 인해 영국까지 올 수 있었던, 즉 영어로 인한 혜택을 그 누구보다 많이 누렸다면 누려왔을 필자로서 이 문제에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는가 하는 고민이 살짝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비록 대단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영어와 관련해 그래도 고쳐야 할 점들을,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의견을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한국 직원이 단 한 명도 없는 외국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필자에게 간혹 한국인들이 건네는 말이 있다. “영어가 완벽하신가봐요?” 특히, 부러움 반, 호기심 반으로 물어오는, 이제 막 영어를 익히기 위해 한국을 떠나온 이들이나, 한국에서 영어로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당연히 필자의 영어는 완벽하지 않다, 아니 더 정확히는 영어에 ‘완벽’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완벽한 영어란 과연 무엇일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과 똑같이 듣고, 발음하고, 읽고, 쓰는 것을 말하는 걸까? 그렇다면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리들은 과연 한국어가 완벽한 것인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유창한 우리말 발음을 갖고 있고, 우리말로 자신의 생각을 담은, 또는 필요한 어떤 글이라도 완벽하게 쓸 수 있는가? 언어에 있어서 과연 ‘완벽’이라는 개념이 가능한 것일까? 비록 ‘완벽’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연 모든 이들이 완벽한 언어를 구사해야만 하는 것인가?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