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젊을 때는 예리하다, 그래서 잘못된 것을 보면 그 잘못을 찌르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는 확실한 대안이 있지 않은 한, 더 이상 잘못이 보인다고 무조건 찌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치료(대안)없이 찌르면 아프기 때문이다.” 설교 시간도 아니었고, 여러 명이 있는 자리에서 편안하게 했던 말씀이었지만, 평소 찌르기를 서슴없이 하는 필자로서는 마치 필자를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지난 몇 주 동안 ‘영어의 노예들’을 연재하면서 본의 아니게 필자의 글이 그저 치료(대안) 없는 ‘찌르기’로 일관된 것은 아니었나 하는 반성이 되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현재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인수위, 그리고 학교, 학원, 교사, 학부모, 학생, 더 나아가 영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현재 필자를 비롯, 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찌르기’는 오히려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데 그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영어의 노예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절반도 채 하지 못했던 바, 그럼에도 필자 자신에게 영어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해 줄 만한 대안이 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필자가 가장 원했던 것은 교육이든, 시스템이든, 외형적인 변화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 변화였다. 영어를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남보다 잘 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게 되는 학생 시기를 거쳐, 갑자기 영어를 의사소통 수단, 필수적인 능력으로 요구하는 사회, 이 둘 간의 부조화를 억지로 조화시키려는 국가,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각 개개인의 의식 변화를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군다나 오랜 세월 축적된 의식인데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경쟁 요소로 작용하는 영어에 대한 의식 변화가 어찌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단순히 영어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우리 교육의 총체적인 문제, 우리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의식구조, 민족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복합적인 사안이다. 초등학생이 수능영어를 배워야 하는 현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도 자신의 자녀가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기를 바랬던 어느 학부모가 한 학기 정도의 선행학습을 시켰을 것이고, 그것을 파악한 다른 학부모들이 하나 둘 동참하면서 한 학기 선행학습으로는 여의치 않자, 한 학년, 두 학년 선행학습을 시켰을 것이고, 어느새 그것이 고3들의 수능 영어를 시키는 데 이르렀을 것이다. 초등학생이 고등학생 수준을 선행학습을 해야 하는, 그래서 사교육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탓하는 이들은 결국 그러한 현실을 초래한 주된 원인은 바로 자신들의 그릇된 의식을 포기하지 않은 데 따른 것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한 명이라도 바른 길을 소신껏 실행할 수 있으면, 그래서 그런 개개인들이 다수가 되고, 결국 전체가 되면 모두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을, 모두가 잘못된 방향인 줄 알면서도 대다수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더욱이 그것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때문에 함께 고통을 겪는 안타까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교육 체제나 실용성에 대한 문제도 사실 지금 심기가 불편해진 영어 교사들, 영어 교사 지망생들만 이번 영어 교육 개선안으로 도마에 오르고, 고통을 겪는 것은 좀 불공평하지 않은가? 실제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의 실용적인 소양을 갖춘 교사들이 과연 이 땅에 얼마나 있을까? 다행히 영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이 되질 않은 까닭에 도마에 오르지만 않았을 뿐, 개선안이 필요한 것은 비단 영어 교육 뿐만 아니라 우리 교육 전반, 그리고 초중고 뿐만 아니라 사회인 양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학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총체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 고민은 단순히 현 시기에 자신의 자녀가 직접 교육 과정에 있는 학부모나, 교사, 학원을 비롯 교육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인이 되는 이들을 맞이하는 기업, 사회, 국가가 함께 고민하고, 최선의 개선방안을 마련하여 모든 이들이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아무리 예리한 것이라 해도, 찌르기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판단 하에 ‘영어의 노예들’을 다음 주로 마치려 한다. 다음 주 마지막 시간에는 말 그대로 허접하지만, 적어도 영어의 노예만은 아니라고 확신하는 필자의 영어 경험담을 나누려 한다. 그래서 필자처럼 한국 사회의 잣대로 영어를 잘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영어의 노예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영어에 대한 의식 변화의 아주 작은 동기 부여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며…
다음 주 마지막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