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올빼미 체질이 슬슬 기지개를 켜면서 밤 늦게까지 깨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심야 방송들을 접하게 되었다. 요리 조리 주파수를 돌리다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 음악이 나오거나, 아니면 진행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좋은 느낌(?)으로 다가올 경우 그 주파수에 머물곤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밤 9시부터 자정 무렵까지는 10대 청소년들이 많이 청취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도 좀 있는 진행자에 선곡이나 내용도 제법 재미있고, 밝은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자정 이후의 방송들, 말 그대로 심야 방송들의 진행자들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분한 목소리와 진행으로 푸근한 밤 시간을 선사했던 것 같다.
어느 새벽 우연히 잡힌 주파수에서 좋아하는 영화 음악이 흘러나왔고, 이어진 여성 진행자의 음성이 너무나 따스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하늘나라로 떠난 故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FM 영화음악’이었다. 지금이야 엄청난 양의 영화 정보가 인터넷에 넘쳐나지만, 당시만 해도 ‘스크린’, ‘로드쇼’와 같은 영화 잡지들이나 영화 음악 전문 방송이 유일한 영화 매체였던 시절, 영화에 거의 미쳐 있었던 필자로서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방송이었다.
기타리스트이자 영화 음악가인 마크 노플러가 연주하는 영화 ‘Local Hero’의 테마 음악이 잔잔하게 깔리면서 그날 그날 참 인상적인 오프닝 멘트를 건냈던 정은임 아나운서, 당시에는 나이도 어리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그렇게 들었던 오프닝 멘트들이었는데, 제작년부터 영국에서 다시 ‘FM 영화음악’을 듣다보니 당시 정은임 아나운서의 멘트들은 상당히 시사적인 그것으로써, 당시의 다양한 사회 부조리, 비리, 또 정의와 평등, 인류의 미래와 같은 세계의 이슈들을 또렷한 목소리로 다루고 있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87학번 이었던 정은임 아나운서는 상당히 의식이 있는 방송인이었고, 95년에 ‘FM 영화음악’을 떠나게 된 사유가 노조 활동 때문이었다는 기사를 훗날 읽게 되면서 다시 한 번 보기 드문 훌륭한 방송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연예인화 되어가는 예쁘고 잘생긴 젊은 아나운서들과는 분명 다른 그 무엇이 있었던...
어쨌든, ‘FM 영화음악’은 지금 들어도 너무나 훌륭한 영화 전문 방송이었다. 배우, 감독을 상세히 소개하는 코너, 출연자가 선정한 내 인생의 영화 Best 5,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듣는 시간,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코너, 한 편의 영화를 들려주는 시네마 천국 등 정말 유익하면서도 재미있었던, 예리하면서도 따스했던 내용들이었다. 특히,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코너는 영화 읽기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으며, 독특한 말투와 유창한 그의 달변에 빠져들다 보면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헐리우드의 오락 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던 당시 제 3세계의 영화나 비록 관객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품성을 갖춘 훌륭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훌륭한 역할도 했던 것 같다. ‘시네마 천국’ 칼럼에 소개한 적이 있는 ‘신부의 아버지’, ‘사랑의 행로’ 같은 영화들은 당시 ‘FM 영화음악’의 시네마 천국 코너를 통해 접했던 영화들로, 방송을 녹음해서 여러번 들으면서 사랑에 빠졌던 영화들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따스한 목소리만으로도 분명 미인일 거라 확신했던 정은임 아나운서의 모습을 볼 기회가 찾아왔는데, 너무나 반갑게도 그녀는 ‘출발 비디오 여행’이라는 TV프로의 진행도 하게 되었고, 그녀는 예상대로 어지간한 여배우 뺨치는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지성과 미모를 두루 겸비한 정은임 아나운서를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 사춘기 시절 얼마나 사모했던지... 지금 떠올려 봐도 당시 필자는 여배우나 여가수보다 분명 정은임 아나운서를 더 좋아했다.
새벽 1시에 시작하는 심야 방송인 만큼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들었다. 일산 신도시에서 서울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방과 후 어머니가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드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차 안에서 녹음한 테이프로 듣던 ‘FM 영화음악’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당시에는 정말 영화 음악 음반이 빌보드 순위에 많이 오르고, 1위도 많이 했었는데... 영화 산업은 훨씬 더 거대해진 지금, 그럼에도 그 시절의 영화 음악처럼 심금을 울렸던 좋은 영화 음악들은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워 진 것 같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시절 영화와 음악은 필자가 살아가는 이유였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 시절 ‘FM 영화음악’을 통해 수 많은 꿈들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들었던 음악과 그 시절 보았던 영화들로 인해 간직된 감성과 기억들이 서른 줄에 접어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 깊은 그 곳에서 변함없는 휴식과 행복을 준다.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화려해야 하는 요즘의 방송들, 비록 그 순간은 웃음을 주고, 짜릿함을 주건만, 그 시절 라디오 스타들이 선사했던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인터넷 덕분에 당시 정은임 아나운서의 방송을 다운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제작년부터 등하교 길에, 출퇴근 길에 다시 정은임 아나운서의 음성을 듣고 있다. 비록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더 이상 까까머리 고등학생도 아니고, 그 때처럼 영화 감독을 꿈꾸는 소년도 아니건만, 넥타이 부대들 틈에 낀 만원 지하철 칸에서, 답답한 도시의 고층 빌딩 숲에서도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FM 영화음악’을 들으면서 내 영혼은 지난 날 10대 시절로 돌아가 아련한 꿈에 잠긴다. 차가운 표정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마치 영화 화면처럼 다른 세상으로 느껴지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속삭이는 “편한 밤 되세요”를 들으면서 전쟁터 같은 직장으로, 세상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그나마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