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출근 길에 기차, 즉 National Rail을 타고 워털루까지 가는데 오늘은 특별히 출근 전에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윔블던에서 지하철, 즉 Tube를 오랜만에 타게 되었다. 윔들던이 정거장인데 출발 시간이 거의 다 되었던지 앉을 자리가 거의 없어서 서 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마침 한 자리가 남아 있어서 냉큼 앉았다. 아무리 많이 잔 날도 여지없이 피곤한 출근길에 날씨까지 잔뜩 추워져서 편하게 앉아서 가고 싶었건만, 대략 할머니 처럼(?) 보이는 영국 여자분이 막 들어와서 힘겹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아, 그냥 눈 감고 명상(?)이나 하고 있을껄~’하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딱 봐도 젊어 보이는 외국인들도 눈을 말똥 말똥 뜨고 앉아 있었건만, 아무도 자리를 양보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른 척 앉아 있자니 마음이 영 찜찜하고, 마침 필자가 앉은 자리는 노약자석이었다. (영국에서는 노약자석이 한국에서처럼 엄격히 지켜지지 않는다, 멀쩡한 사람들도 잘 앉고, 노인들도 한국처럼 당당히 자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필자의 자리까지 총 네 자리의 노약자석 이었건만, 네 명 모두 젊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평소 같으면 외국인, 그것도 영국인처럼 보이는 사람한테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일어나서 그 분께 자리를 양보하고 출입문가에 기대어 섰다.
진짜 별 것 아닌 것이지만, 다른 외국인들이 슬쩍 내 눈치를 보는데 괜히 우쭐해졌다. 속으로 ‘젊은 서양 것들아, 이것이 바로 동양의 멋진 미풍양속이야!’라고 외치고 있던 찰나, 이번에는 지팡이를 집은 어떤 중년의 서양 여성이 내게 오더니 자기 다리가 불편하다고 문가 옆의 기댈 수 있는 자리를 양보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 왔다. 오늘은 무슨 양보만 해야 하는 날인가 싶었지만,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사람이 편히 기대서라도 가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역시 양보를 하고 다른 쪽으로 옮겨 섰다.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면서 창밖을 바라보다 그 여자분이 잘 기대어 서 있는지 돌아 보았더니 그 자리에는 필자가 앉는 자리를 양보한 할머니가 서 계셨고, 할머니께 양보했던 자리를 보니 지팡이를 집은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필자가 양보한 자리를 할머니가 다시 양보한 것이다, 비록 할머니지만 다리가 불편한 여성보다는 본인의 상태가 더 낫다고 여기셨나 보다.
양보가 연달아 벌어진 광경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진짜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도 괜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만을 챙기고, 나만을 위하는 것보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타인을 생각하는 것이 참 소중한 것인데,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아주 작은 양보 한 번 안 하면서 지내왔던지...
세상살이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몸소 깨달으면서, 먹고 살기 위해 벌이는 전쟁에 시달리면서 어느새 나는 이상한 피해의식 또는 옹졸한 마음씨를 갖게 된 것 같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세상 살이에 이렇게 시달리는데, 내가 왜 양보를 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 같다. 나도 힘들게 사는데, 세상살이에서도 충분히 이런 저런 일을 당하기 때문에, 내가 손해보는 짓(?)은 절대 안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더구나, 한창 힘들었던 학생 시절, 특히 영국인(그 때는 외국인은 다 영국인으로 간주했다)들이 너무나 얄미웠고 영국이라는 나라가 원망스러웠던 시절, 내가 굳이 영국 사람에게까지 양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양보는 결국 양보를 하는 사람이 더 큰 기쁨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행복을 얻는,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닌데, 그릇된 마음씨를 가지고서 한 동안 조그만 양보 조차도 인색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 졌다. 노숙자를 위해서, 양로원 노인들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상당한 선행이라 여겼는데, 어떻게 보면 일상 속에서 이렇게 작은 양보 조차도 하지 않고 살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인정 많은 척 하는 내 모습이 상당히 위선적이라는 반성이 되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이런 표현이 조금 우습지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점점 나만을 위하게 되고, 남을 위하기가 힘들어져 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현대 사회 자체가 각박해져 가는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내 마음, 내 영혼이 메마르고 차가워져 가는 데 따른 것일 게다. 이성으로는 베풀고, 양보하는 게 맞다고 여겨지면서도, 정작 실제 상황에서는 선뜻 마음이 내켜지지 않고, 심지어 그런 것들이 귀찮게까지 여겨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 위주로만 사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주위를 둘러 보아도 베풀어야 하는, 양보해야 하는 일 자체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일 수록 아주 작은 베풂, 아주 작은 양보가 너무나 필요한 것 같은데... 그것이 어떤 것이든, 크던 작던, 하루에 한 가지라도 그 누군가에게 의미있게 양보하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