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쳐갔다. 먹고 사는 일도 정신 없는데, 거기에 마음 아픈 일들, 스트레스 받는 일들이 겹쳐지니 만사가 귀찮고 신경질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평소 그런 비교를 하지 않는 필자였건만, 요즘은 괜히 전형적인 한국식의 비교, 그러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얼마나 많이 버는지, 나보다 얼마나 잘 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걸 갖추었는지 같은 부질없는 비교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다. 특히, 나보다 어리고 영국에 온 지도 얼마 안 된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잘나가는 것을 보고는 괜히 내 신세가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한동안 감사할 줄 모르고, 그저 불평에 투정만 부리는 못난 마음자세로 지낸 것이다.
무더위를 식혀 보려고 퇴근 후 오랜만에 영화 ‘쏘우’ 1편을 다시 봤다. 처음 본 게 2005년도 였으니, 굉장히 오랜만에 본 셈이다. 얼마 전 5편까지 나왔지만, 사실 ‘쏘우’ 시리즈는 1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얄팍한 상업성으로 만든 졸작들이다. 어쨌든, ‘쏘우’는 매우 잔혹한 스릴러물이지만, 이번에는 왠지 주인공이 희생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은근히 진지하게 여겨졌다.
이 영화는 암에 걸린 주인공이 희생자들에게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들에게 무시무시한 게임을 강요하는 이야기이다. 희생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톱으로 자신의 다리를 자르고, 깨진 유리조각 위를 맨발로 밟고 다니며, 다른 이의 신체를 절단하는 등 극한의 상황에 처하고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들에게 얘기한다, “너는 평소 네가 살아있다는 것에 전혀 감사하지 않았으나, 이제 너는 그것을 배웠다.”
목숨을 빼았긴다는 상황이 되면 저렇게 끔찍한 고통도 감수하면서 살고 싶은 게 인간인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음을 전혀 감사하지 않고 지냈다는 사실이 문득 뒤통수를 쳤다. 사실, 이 영화는 그다지 교훈적인 메시지를, 또 정상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영화는 아니었는데, 이 영화를 보는 필자의 상태가 상태였던지라 주인공의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가슴 깊숙히 파고 들었다.
왜 이렇게 삶이 힘드냐고 불평하고 짜증을 냈던 시간들 조차 사실은 참 감사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내왔다. 아마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자꾸 무뎌지다 보면 감사함을 잊는다는 것이다.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잘난 것도 없는 내가 이렇게 발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아직 첫 직장도 구하지 못한 이들도 넘쳐나는데, 그 와중에 별 재주도 없는 내가 이렇게 직장에서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이 정도면 위험하겠다(?) 싶을 때마다 그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생겨났다. 회의를 할 때도 오늘 회의는 위험하겠다 싶을 때마다 전혀 준비하지도 않은 무언가(?)를 터뜨려서 간신히 그 위험을 벗어나고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매 순간 베풀어 주신 기적이 아니었으면 큰 일 날뻔한 적이 한 두번 이 아니다.
기적은 먹고 사는 일에서만 발생하지 않았다. 가끔 여러 시간 운전을 해서 지방에 다녀오는 경우가 있는데, 비교적 속도도 내지 않고 얌전하게 운전하는 편이라 위험한 상황을 겪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위기 상황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상당한 속도로 달리는데도 뒷 차가 하도 바짝 붙어서 오길래 무의식 중 차선을 변경했는데, 그만 도로 위에 큼직한 사다리(?)가 떨어져 있었던 것을 못 보고 급하게 차선을 변경한 것이다. 사다리가 왜 거기에 놓여져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고속도로였으니 그 사다리를 밟았으면 차가 균형을 잃었을 것이고, 그 뒷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다행히 그 사다리를 건드리지 않고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면서 차선이 변경되었다. 같이 탄 사람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거의 사색이 되었다. 너무 놀라면 소리를 지를 수 없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또 한 번은 국도를 달리다가 라운드어바웃에서 서행하면서 돌고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씽~ 하면서 바로 내 차 앞을 스쳐갔다. 그래도 나는 서행 중이어서 경적을 울렸고, 그 차도 너무나 놀란 모양인지 나를 비켜서서 혼자 정지해 있다가 떠났다. 당연히 그 차의 잘못이었는데, 내가 진입해서 돌고있는 줄 모르고 거의 직진처럼 고속으로 달려들어온 것이다. 정말 그 순간에는 그 차가 내 차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정신이 멍해지면서, 이게 지금 부딪힌 것인지 아닌지조차 혼란이 올 정도였다. 나까지 속도가 있었더라면 정말 대형 사고가 났을 것이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시라, 라운드어바웃에서는 진입한 차가 있든 없든 무조건 서행하시길!
이런 저런, 크고 작은 기적들로 인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음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다시 마음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뒤돌아 보면 오히려 가진 것도 더 적었던 예전에 나는 더 많은 것들에 감사하며 살았던 것 같은데... 결국 감사하는 마음은 얼마나 많이 갖고, 얼마나 편안하게 잘 지내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닌가 보다.
그저 지금 내가 누리는 그것들로도 너무나 감사한 것인데, 돌아보면 모든 게 기적인 것을...
조금 더 감사하고, 또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용서하며,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