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들 – 어느 설날의 풍경

by 유로저널 posted Feb 0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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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국 4년차’편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요즘에는 영국 생활 초창기와는 달리 한국을 향한 진한 향수를 느끼곤 한다. 회사 일도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요즘, 그러나 그렇게 바쁠수록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그리움... 그 그리운 마음들을 담아서 남은 2월 동안에는 그리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꾸며보려 한다.

이제 며칠 있으면 한국에서는 구정 연휴가 찾아온다. 이역 만리 타국 땅에서 한국의 명절은 그닥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었는데, 작년부터는 한국의 명절이 새삼 그리워졌다.

그 중에서도 유년기의 설날 풍경들이 가슴 시리도록 떠오른다. 어린 시절 설날은 보통 설 전날 연남동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서 다음날에는 김포에 있는 큰할아버지 댁에 성묘를 다녀오고 다시 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와서 저녁에는 정릉에 있는 외가 이모네 집으로 가는 게 코스(?)였다.

형제 없이 외아들로 자란 필자로써는 여러 친척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고, 또 당시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음에도 집에는 비디오가 없었는데 할아버지 댁에 가거나 이모네 집에 가면 비디오가 있어서 좋아하는 영화를 실컷 빌려다 볼 수 있다는 점도 너무나 설레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댁에서 비디오도 실컷 빌려다 봤지만 설에는 TV에서 참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보여줬다. 어린 시절에는 만화들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조금 더 자라서는 설이면 어김없이 한 두 편씩 편성되어 있었던 성룡의 영화들이나 쿵후 영화들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렇게 온 종일 재미난 것들을 보다가 부엌에 가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막 구워진 따끈따끈한 빈대떡을 받아먹곤 했었는데...

구정 때는 눈이 내린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연남동의 좁은 골목길들과 눈이 쌓인 할아버지 댁 마당, 그리고 시골 김포의 한옥집들과 겨울날의 들녘, 그 시절에는 그 풍경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데, 요즘에는 그 한국의 겨울날 풍경들이 너무도 정겹게만 떠오른다, 심지어 귀가 얼얼해지는 한국의 매서운 추위마저도.

어린이들에게 설날이 추석보다 더 즐거운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세뱃돈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 댁과 김포에서 세배를 마치면 이미 주머니가 두둑해졌는데, 그리고서 설날 저녁에는 외가 이모네 집으로 향했고 거기서 또 세뱃돈을 받았으니, 그 동안 사고 싶었던 장난감도 살 수 있었고, 이후 몇 달은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친가에서도 나중에는 사촌 남동생들이 태어났지만 아무래도 외가의 사촌형들과 사촌남동생과 더 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것 같다. 두 살 터울로 큰 형, 작은 형, 필자, 그리고 동생이 있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살지 않았기에 명절은 사촌들과 마음껏 어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특히, 필자와 동생은 형제 없이 자란 외아들로 외로움을 많이 타던 탓에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을 것이다.

설날 저녁에 이모네 집에 도착하면 지금은 하늘나라로 떠나신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삼촌들과 이모네 가족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커다란 상을 놓고 앉아서 맛있는 음식들과 술잔이 오고 가면서 어른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우리 넷은 큰 형 방에 모여서 우리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웠다.

두둑하게 받은 세뱃돈을 들고 넷이서 오락실에 가면 두 세시간은 거뜬히 보냈던 것 같다. 가끔 오락실에는 불량한 형들이 있어서 두렵기도 했는데 이 날 만큼은 든든한 형들과 함께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그렇게 오락실 답사를 마친 뒤에는 과자들과 군것질 거리들을 잔뜩 사들고 다시 돌아와 밤 늦도록 TV를 보거나 비디오를 빌려다 보거나 했다.

당시 우리들은 겨울방학이었고 그렇게 이모네 집에 가면 동생이랑 필자는 며칠씩 이모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마음껏 놀 수 있었다. 그러나, 형들이 학년이 높아지고, 또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기도 하고, 그러다 필자도 학년이 높아지고, 그러면서 어느새 그 어린 시절의 즐거운 설날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필자는 그 고향의 모습들을, 그 설날의 풍경들을 꿈에서나 그려보는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지만, 유난히 설날이 다가오면 더더욱 그리워진다. 자식이라고는 필자 하나밖에 없는 부모님께서 얼마나 적적하실지 생각하면 그것 만으로도 너무나 큰 불효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설날만큼은 부모님과 함께 보내며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아버지와 술잔을 주고받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형들과, 동생과 그렇게 넷이서, 비록 이제는 이렇게 성인이 되어 그 어린 시절 동심은 잃었을지언정 함께 마주앉아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추억에 취해보고 싶다.

어느 설날의 풍경, 그 그리운 순간들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림 출처: [오후-당진 마을의 겨울] 40호 수채화 1998년, 윤석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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