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상관이 오늘의 동료가 되는 세상

by 유로저널 posted Mar 2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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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일하는 회사에는 한국인이 필자 한 명이다. 처음에는 이게 참 좋았다. 한국 회사에서처럼 누구 눈치를 보거나 엄격한 상하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도 없었고, 가끔 사적인 전화를 한국어로 사무실에서 맘 놓고 할 수 있는 특권(?)도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이게 업무 상 통화인지, 사적인 통화인지 한국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알 턱이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야말로 한국인의 끈끈한 정을 나눌 대상이 한 명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슬그머니 들더라는 것이다. 업무 바깥에서도 친분을 나누고 마음 맞는 날은 퇴근 후 맥주 한 잔도 할 수 있는 그런 대상. 알다시피 영국 직장문화는 철저히 사생활 중심이고 자기 가정 중심이라 한국처럼 퇴근 후 어울리거나 하는 문화가 없다. 게다가 직원들의 대부분이 여성이라서 마음 맞는 직장 동료를 갖는 게 더욱 어려웠다.

지난 회에도 언급했지만 필자가 하는 일은 원맨쇼(?)처럼 철저히 개인역량에 따른 업무라서 상관의 간섭을 받는다거나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입사 초기에는 팀이 구성되고 팀 관리자가 있었으며, 나름 상관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겪은 것 같다.

필자가 속한 팀의 관리자는 남성으로 필자보다 나이가 서너살 많은 오리지널 영국인이었다. 회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한 베테랑으로, 단순한 직원이 아니라 부관리자 정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래도 필자가 신입이다 보니 비록 필자의 업무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아도, 그가 일종의 필자의 상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

1주일에 한 번씩 그가 주도하는 회의가 있고, 한 주간의 내용을 보고도 하고, 지적도 받았다. 그런데, 이 영국 친구가 제법 깐깐한 성격이라 가끔 짜증도 내고 은근히 압박을 하기도 해서 필자 나름대로 스트레스도 조금 받았다. 그렇게 한 6개월 가량을 지냈던 것 같다.

이후 회사에 여러 변화들이 생기면서 그는 부관리자의 자리에서 강등되어 필자와 같은 입장, 그러니까 그냥 필자의 동료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필자 역시 회사에 적응하고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필자의 실적이 그를 능가하기도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팀 관리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괜히 밉기도 했던 친구였는데, 막상 같은 처지의 동료가 되니 그도 결국 평범한 인간(?)이구나 싶다. 이제는 필자가 휴가로 자리를 비우면 필자의 업무를 대신 봐주기도 하고, 필자 역시 그가 휴가로 자리를 비우면 그의 업무를 봐주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제는 어쩐 일인지 저녁에 맥주 한 잔 할 시간이 있냐고 물어왔다. 사실, 집에 가서 더 맛있는(?) 걸 먹을 계획이었는데, 이 친구가 이렇게 얘기하는 게 처음이었고, 또 영국인들은 어지간해서는 퇴근 후 동료와 한 잔을 잘 안 하는지라 거절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최근 필자가 1주일 이상 되는 휴가를 두 번이나 다녀오는 중 그가 필자의 업무를 대신 봐준 것이 고마워서 맥주도 필자가 샀다. 이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와이프와 두 살짜리 아들이 일본에 한 달 가량 가 있어서 (와이프가 일본인이다) 혼자 지내느라 적적하기도 했고, 불경기로 업무도 쉽지 않고, 이런 저런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 때는 밉살스러운 상관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동료가 되어버린 그의 힘 빠진 모습에 필자가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고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가 상관이었을 때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어제는 그가 한 편 불쌍하기도 하고, 나름 인간미도 느껴지고, 그도 알고보면 슬퍼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받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모두가 동등한 존재인데, 누구나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인데, 결국 인간이 만든 다양한 계급과 사회적인 틀로 인해 그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상관의 위치에서 필자에게 은근 스트레스를 줬던 그와 지금 오히려 필자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동료인 그는 동일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군대도 그런 것 같다. 군대에서는 계급으로 인해 고참과 후임병의 위치가 결정되고 관계가 형성된다. 부대 안에서는 너무나 무서운 고참이지만 군복을 벗고 민간인의 신분이 되면 결국 평범한 또래 젊은이일 뿐이다.  

후임병들에게 엄청 못되게 굴던 한 고참이 전역하는 날, 그러니까 그의 계급을 내려놓는 날 후임병들에게 매를 맞고 안경이 박살나는 추한 모습을 보였던 게 기억난다. 반면에 인격이 참 좋았던 고참은 전역하는 날 후임병들의 박수와 따뜻한 인사를 받았던 것도 기억난다.

최고참이 되어 부대원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못된 고참도 제대하면 결국 평범한 젊은이로 돌아가듯, 깐깐한 직장 상관이 평범한 동료가 되듯, 우리는 언제 어떻게 우리가 누리는 계급과 지위를 내려놓게 될 지 모른다.

그렇게 될 때 동등한 위치에서 다시 만나게 될 후임병을, 직장 후임을 웃는 얼굴로 편하게 마주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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