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퇴직

by 유로저널 posted Feb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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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아버지는 체육선생님이시다. 아니, 정확히는 ‘체육선생님이셨다’고 해야 맞겠다. 한 학교에서 35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근속하시고, 이제 그 멋지고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으셨다.

지난 달 휴가 차 한국을 방문해서 부모님과 함께 아버지가 근무하신 학교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이 글과 함께 올려진 사진은 그 때 찍은 것이다.

아버지가 주로 수업하신다는 운동장 한 구석, 그 곳에서 아버지는 내 나이보다 많은 세월을 한 여름 땡볕에서도, 한 겨울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우리 가족을 위해 뛰고 또 뛰셨다.

자녀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 줄 안다. 아버지는 절대 지치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가족을 위해 든든하게 그 자리를 지켜주실 슈퍼맨 같은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사회와 세상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내 아버지 역시 삶의 무게 앞에 지치고 고달플 수 있는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러나 가족을 위해서 지치는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삶을 묵묵히 버텨내셨다는 것을,
내 아버지 역시 한 때는 높고 푸른 꿈을 품었던 혈기왕성한 한 남자였다는 것을,
그러나 가족을 위해서 그 꿈을 흐르는 세월에 녹여버리셨다는 것을...

아버지는 필자보다 키도 크시고 씨름, 유도, 보디빌딩을 하셔서 몸도 좋으시고 그야말로 천하장사셨다. 당연히 나는 세상에서 내 아버지가 가장 힘이 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넓어만 보였던 아버지의 어깨가 언제부턴가 더 이상 넓어 보이지 않고, 마냥 강하게만 보였던 아버지가 아들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덧 세월이 흘렀음을 깨닫는다.

우리 식구가 이렇게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아버지, 나는 감히 흉내내기도 힘든 정도(正道)와 성실함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신 아버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아버지가 매 순간 너무나 그리워진다.

아버지는 내 평생 최고의 술친구다. 아버지를 감히 술친구라고 부르는 게 버르장머리가 없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만큼 나는 아버지와 보내는 매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소중하다.

철이 들고 성인이 되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아버지를 공경하지만, 진짜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아서 그러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화제가 된 어느 초등학생의 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처럼 이 시대 아버지들은 너무 외롭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건만, 돌아오는 것은 어느새 가정에서 왕따가 되어 버린 초라한 신세다.

그런 면에서 내 아버지는 비록 평생 큰 돈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대신 아버지가 흘리신 땀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가족이 있으니, 아버지가 인생 최고의 술친구라는 아들이 있으니 결코 외롭거나 초라하지 않으실 것이다.

부끄럽게도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영국으로 떠나오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아버지를 향해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부모님과 떨어져 있다 보니, 또 이렇게 홀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가다 보니 새삼 아버지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소주를 마시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한국을 일 년에 두 번씩이나 다녀오는데, 나는 솔직히 아버지와 소주를 마시기 위해 한국을 다녀온다.  

경제적인 형편을 생각한다면 참 무모한 짓인데,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이야 나중에 또 벌면 되지만, 아버지와 함께 소주잔을 주고받는 그 순간의 행복은 나중에는 수 억 원을 줘도 절대 얻지 못하는 것이다.

휴가 일정이 잡히면 아버지와 어디서 무엇을 먹으며 소주를 마실 지를 계획하느라 설레인다. 여유돈을 한국 방문에 쓰는 덕분에 아직 다른 유럽국 여행도 못 가봤고, 평소 정말 절약하며 지내지만, 조금도 후회가 없다.

내가 지금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도, 아니 지금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서까지도 아버지의 소주잔을 채워드릴 수 있도록 그저 건강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중고등학교에 속한 초등학교를 다녔고, 어린 시절 하교길에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발견하고서 멋도 모르고 아버지에게 달려가곤 했다. 내가 체육선생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본 고등학생 형들은 내게 아버지의 별명이 ‘슈퍼 스타’라고 알려주었다.

굵고 멋진 음성으로 구령을 붙이면서 학생들과 함께 체조를 하시던, 수 많은 학생들의 기억 속에 ‘슈퍼 스타’로 남으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체육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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