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우람한 바위가 솟아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바위를 대왕암(大王巖)이라 불렀습니다. 그 바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데다 우람하게 버티고 있는 모양과 산 아래를 굽어보고 호령이라도 하는 듯한 위풍당당한 자태가 대왕과 같이 위엄이 서려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대왕암은 구름에 덮여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 날은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 위에 대왕암만 홀로 떠있어서 대왕암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로구나’ 하고 하늘을 향하여 외치는 듯했습니다. 가끔 구름이 걷힌 날 아침에는 대왕암이 아침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을 드러내어 저 아래 아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산 봉우리들과 온 세상을 위엄 있게 굽어보며 ‘새 날이 밝았노라’ 하고 외치는 듯하였고 저녁 해질 무렵에는 붉게 물든 신비로운 모습으로 ‘오늘 하루 수고하였다. 안식할지어다’ 하고 소리치는 듯하였습니다. 구름에 가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가끔 구름이 걷히면서 드러나는 대왕암의 장엄함과 신비로움에 사람들은 경탄하였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전율(戰慄)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버텨온 대왕암이 영원히 존재하리라 믿었습니다.
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마치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도 일어나려는 듯 시커먼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고 광풍폭우(狂風暴雨)가 온 세상을 휘몰아치더니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면서 대왕암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벼락을 맞은 대왕암은 반으로 쩍 갈라져 산 아래로 한없이 굴러 떨어졌습니다. 벼락맞아 갈라진 대왕암은 마치 고구마를 반 토막 낸 것처럼 길쭉하였으나 산을 굴러 내리는 동안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면서 모난 부분이 깨져 나가면서 점점 둥그스름한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한참을 굴러 내리던 대왕암은 마침내 높은 절벽에 이르러 계곡 물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계곡물은 물살이 세어서 작은 돌들이 끊임없이 굴러와 대왕암에 부딪쳤습니다. 때로는 홍수로 산사태가 나서 굴러 내려온 바위들이 대왕암을 깨부수기도 하였습니다. 대왕암은 굴러온 돌에 부딪쳐 깎이고 흐르는 물에 깎여 나가면서 크기가 작아지고 모양도 둥글둥글해졌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자 위풍당당하고 장엄했던 대왕암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바위가 되어있었습니다. 이제는 흐르는 물에도, 웬만한 물살에 굴러오는 자갈에도 시달릴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해에 몇 번 폭풍이 몰아쳐 큰물이 나고 산사태가 나면 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나 급물살에 휩쓸려 내리는 돌들에 부딪쳐 여러 조각으로 깨지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긴긴 세월이 흐르면서 대왕암은 주먹만한 자갈이 되었다가 한줌 모래알이 되어 물살 따라 흘러갔습니다. 굽이굽이 산을 휘돌아 흐르는 강을 지나 바다에 이르는 동안 한줌의 흙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대왕암은 더 이상 영욕(榮辱)으로 희비(喜悲)하지도 않고 어떠한 것에도, 어떠한 일에도 시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