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면서 틀이 생긴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깔끔하고 단정하며 이기적이고 정이 적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정이 많고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역사나 전통과 같은 인문 사회적인 환경에 따른 틀도 생긴다. 동양 사람은 유교적인 환경이어서 어른을 공경하고 연장자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기독교적 문화에 젖어있는 서양사람은 어른의 관념이 희박하고 능력과 권한에 권위가 따른다. 훌륭한 학교 선생님이나 학교 선배, 유명한 학자나 성직자, 사회활동가나 기업인, 이야기 속 주인공 … 하나하나 본받고 살다 보면 어느새 그러한 사람을 닮아간다. 살면서 시련을 겪고, 역경을 이겨내고, 또는 풍요로움 속에서 어려움 모르고 살다 보면 삶의 경험에서 형성되는 나의 모습이 있다. 부지런한 사람, 정직한 사람, 철저한 사람,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하는 사람, 고집 센 사람, 고상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예의 바른 사람, 냉철한 사람, 정이 많은 사람, 강직한 사람, 우유부단한 사람, 신심이 깊은 사람,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 소심한 사람, 대범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 …
그래서 취향이 같지 않으면 친구가 되려 하지 않고, 신앙이 같지 않으면 멀리 하고, 이념이 같지 않으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콜라 병을 신으로 모시는 부시멘에게 그것이 신이 아니고 유리병에 불과하다고 하여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아직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종파가 틀리면 서로 자기만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면서 싸운다. 상처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봉침(蜂針)이 상처를 곪지 않게 하고 치유력이 높다고 권하여도 어떤 사람은 봉침이 과학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죽었으면 죽었지 봉침을 맞지 않겠다고 한다.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을 자기 속에 담고 틀을 만들어 가지고 있다. 그 틀 속에 갇혀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자기만 옳다고 그것을 내세우고 자기의 틀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자기의 틀에 세상을 맞추려 한다. 자기의 틀이라는 것은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밖에 없는데 무한한 세상을 좁아빠진 자기의 틀에 맞추려 하니 바라는 대로 될 리도 만무하고 늘 불만이고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주위의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의 틀에 맞추려 하고 상대방이 자기의 틀에 맞게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상대방은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이 달라서 자기가 기대하는 만큼 해 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