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를 재배하는 농부는 수확한 볍씨에 바람을 불어 바람에 날리지 않는 씨앗을 고르고 이듬해 봄에 다시 소금물에 볍씨를 담구어 물 위에 뜨는 볍씨는 버리고 물 밑에 갈아 앉는 볍씨만 골라서 싹을 틔워 모를 기른다. 그리고 모를 옮겨 심을 못자리를 준비하는데 잘 발효된 거름을 넣고 필요하면 흙 갈이도 하고 써레질, 가래질을 하여 못자리를 고르고 모를 낼 준비를 한다. 모가 적당한 크기로 자라면 맑고 따뜻한 날을 가려 모를 내고 뿌리가 잘 내리도록 다져진 흙을 부드럽게 갈아주고 피를 뽑아내어 모가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다. 혹시나 논에 물이 모자라거나 넘치지나 않는지, 폭풍우로 모가 떠내려가고 쓰러지지나 않는지 밤낮으로 보살핀다. 장마와 태풍을 무사히 넘기고 벼가 익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참새가 낟알을 따먹지 못하도록 논을 가로질러 여러 가닥의 줄을 묶어 깡통을 매달기도 하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논 가운데 세워 참새가 논에 날아들지 못하도록 한다. 요즘은 간헐적으로 총 소리를 내어 참새떼를 쫓기도 한다. 이렇게 온갖 노력을 기울여 벼가 다 익으면 수확을 한다. 벼를 베어 낟가리를 만들고 탈곡기로 낟알을 훑으면서 바람을 뿜어 바람에 날리지 않는 알곡과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를 가른다. 알곡은 거두어서 방앗간에 보내어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들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린다.
농부는 봄에 볍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할 때까지 알곡을 한 알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그러다 수확할 때는 ‘알곡이 되어있는’ 낟알은 거두어들이고 ‘알곡이 되어있지 않은’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린다.
성현의 말씀에 심판의 때가 오면 ‘알곡은 거두어들이고 쭉정이는 불구덩이에 던져져서 불에 타서 없어진다’고 하였다. 수확을 할 그 때에 알곡이 ‘되어있지 않으면’ 불구덩이에 던져져서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수확할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먼 훗날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 대비하여 하루 빨리 알곡이 되어있지 않으면 불시(不時)에 찾아오는 수확의 때에 불구덩이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때가 지금은 아니겠지 생각하고 있고 알곡과 쭉정이가 어떠한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알곡이 되는 지도 잘 모른다. 그러면서도 ‘나는 괜찮겠지’ 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또 막연히 ‘알곡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성현의 말씀대로 열심히, 착하게 살다 보면 나중에 알곡으로 거두어지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성현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의인이 없다.
알곡은 티끌만한 흠도 없다. 더럽지도 병들지도 벌레먹지도 않고, 또 생명력이 있어 새싹을 틔울 수 있고 그 새싹을 위해 언제라도 스스로를 ‘그냥’ 내어주는 존재이다. 창조주와 대립하고 있는 자기가 일체 없어 창조주와 하나이되 그 자식인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