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나 예수나 모두 버리고 비우는 삶을 살았다. 석가모니는 왕자로서 누리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옷 한 벌 걸치고 황량한 곳의 한 그루 보리수 나무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였고 예수는 안락한 가정을 떠나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사막에서 고행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한 삶을 살았다. 남을 위해 목숨마저 버렸다. 자기의 뜻(욕심, 집착, 정)도 다 버리고 부처님, 하나님의 뜻으로 살았다.
제자를 받을 때에도 석가모니는 재물, 인연 다 버린 사람을 제자로 삼았고 예수도 처자와 전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였다.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말 한 마디에 생업도 팽개치고 예수를 따라나서 제자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열반 3개월 전에 열반에 들 것임을 아난에게 예고하였고 그 때가 되자 춘다가 올린 돼지감자 요리를 먹고 복통과 설사로 탈진되어 열반에 들었다. 열반에 들기 전 죄의식에 사로잡힌 춘다에게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게 도움을 준 수자타의 공덕(功德)*과 같다고 위로 하였다. 예수도 예루살렘에서 수난을 당할 것임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고 예루살렘에 가서 가롯 유다의 밀고(密告)로 로마 병사에게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는다. 두 성현 모두 세상살이를 다 버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목숨(자기)마저 버림으로써 ‘다 이루었다’. 그리고 목숨마저 다 버려 이루는 데 있어 석가모니에게는 춘다가 있었고 예수에게는 가롯 유다가 있었다. * 수자타의 공덕(功德) : 석가모니가 6년간의 고행을 하고 산에서 내려와 강가에 쓰러져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수자타라는 처녀가 주는 염소 젖을 먹고 기운을 차려 보리수 나무 아래로 돌아가 다시 명상에 몰입하여 40일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
석가는 삶의 지침으로 자비(慈悲)를 말하였고 예수는 사랑을 말하였다. 자비나 사랑이나 둘 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진실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이기적인 자기가 없을 때 가능하다. 또 베푸는 것은 사람은 물론 만물에 대한 것이다. 결국 자비와 사랑은 같은 말이다. 석가는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예수는 ‘뿌린 대로 거둔다’ 하였다. 이 또한 같은 말이다.
오늘날과 같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여 서로의 존재조차도 몰랐던 그 시절에 두 성현이 전한 메시지와 가르침은 너무나 똑 같다. 두 성현의 삶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또 이 땅에 나타난 시점도 같다. 이것은 인간에게 그와 같은 메시지를 ‘알려주고 가르침을 주는’ 우주의 때가 도래하였음을 뜻한다. 이 세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이 우주에 있는 수많은 개체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건.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조화가 유지된다. 나타나 존재함과 생성.소멸하는 모든 것이 필연이다. 성현이 나타난 것도 우연이 아니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필연이다. 성현들이 전한 ‘되는 때’(다시 오는 때)도 필연적으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