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가지미는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청년이 되었고 바라미는 갓 피어나는 목련처럼 고운 처녀로 자랐습니다. 마을 처녀들은 먼 발치에서 가지미가 보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얼굴을 붉히고 총각들은 바라미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넋을 잃고 손에 든 낫을 떨어뜨렸습니다. 마을사람들이 가지미와 바라미를 칭찬할 때마다 어머니는 훌륭하게 자라준 두 아이가 대견스러웠고 나날이 눈물과 한숨으로 지낸 온갖 시름이 햇볕에 새벽 안개 잦아들 듯 녹아 없어졌습니다.
가지미와 바라미 어머니가 읍내 김부잣집 막내딸 혼인잔치에 일하러 가느라 사나흘 집을 비운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 힘없이 사립문을 밀치면서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햇빛에 검게 그을린 깡마른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였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어깨가 축 처지고 허리는 구부정하였으며 애원하는 것도 같고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눈빛으로 무언가 찾으려는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얼마를 굶었는지 허기져 쓰러질 것 같은 작은 몸을 명아주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냘픈 왼쪽어깨에는 오랜 세월을 노인과 함께 한 작은 보퉁이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노인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가늘고 쉰 목소리로 사람을 찾았습니다. 가지미와 바라미는 빼꼼이 방문을 열고 노인의 몰골을 살펴보고는 노인에게 사립문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노인은 자기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전에도 떠돌이 걸인이 집안까지 들어와서 밥을 달라고도 하고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써서 애먹은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가지미와 바리미는 ‘별 미친 노인 다 보겠네’ 생각하며 마당으로 내려서서 빨랫줄을 고이는 막대기로 노인을 때릴 듯이 휘둘러 겁주면서 노인을 집 밖으로 내쫓고는 사립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그 노인은 가지미와 바라미의 아버지였습니다. 고기잡이를 하다가 갑자기 몰아 닥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 겨우 나뭇조각에 의지해 사흘 밤낮을 떠돌다가 지나가는 외국 배에 구조되었습니다. 낯선 이국 땅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그리운 옛집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지미와 바라미는 한 시도 잊지 않고 기다리던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는 가지미와 바라미가 마음에 새겨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가지미와 바라미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새겨둔 아버지는 잘 생기고 건장하며 힘이 장사인데 눈앞에 나타난 아버지는 초라하고 왜소하며 힘없이 축 처진 사람이었습니다. 가지미와 바라미가 그려온 아버지는 실제로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제 마음에 그려놓은, 세상에는 없는 허상의 아버지였습니다. 마음에 그려놓은 없는 허상의 아버지에 매여서 실제로 있는 아버지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