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쉬맨들이 인류역사상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과는 반대로 신앙의 열기는 점점 식어갔다. 새로운 신을 받아들였을 당시의 신선함과 그 후의 신앙에 대한 열정도 식은 지 오래고 신을 모시는 일도 타성화되고 격식화되었다. 물질적인 풍요가 가져온 안일함에 젖어 부쉬맨들은 신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심지어는 회의에 빠져 신을 부정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경전의 말씀도 자기 관념으로 편의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다 보니 같은 말씀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여 여러 파로 갈라져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하며 서로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장님이 코끼리 몸의 일부를 만져보고 코끼리가 이렇다 저렇다 하듯이. 신은 없다는 회의론도 나오고 경전의 약속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겉으로는 믿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누가 죽어보았나, 누가 신을 보았나 하고 냉소(冷笑)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말씀의 뜻을 몰랐다.
그리고 신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경전을 읽거나 신관으로부터 들은 것을 토대로 막연하게 신은 이러할 것이다 하고 신을 그리고 있었다. 경전의 뜻도, 신관의 말도 각자의 관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니 사람마다 그리는 신이 제 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 자기관념으로 그리고 있는 신(觀念의 偶像)을 믿고 있었다. 그 관념의 신에게 기도를 바치고 복을 주십사 하고 빌었다. 관념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경전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살지 못하다 보니 회의에 빠지고 적당히 타협하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럴듯하게 합리화하며 살았다. 경전의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니 죽을 때까지 말씀대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자위하고 있었다. 경전의 말씀은 분명히 ‘이러저러하니 알겠느냐?’가 아니라 ‘이러저러하니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렇게 살아라’ 는 말씀인데도 경전 말씀대로의 삶을 살지 못하고 경전을 머리로 이해하여 아는데 불과하였다. 그 아는 것조차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 저 세상의 일을 알려주고 있는 경전의 말씀을 사람이 살고 있는 이세상의 관념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또 무한한 신의 의식으로 한 말씀을 좁디 좁은 인간의 의식으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경전을 줄줄 외는 것으로 남보다 충실히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은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지를 몰랐고 또 그렇게 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몰랐다. 어느 누구도 원리와 방법을 알 수도 없었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경전 속에 원리가 있어 말해주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들어 알지 못하였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삶의 전범을 보여주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고행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두고 깊이 명상을 하고 연구도 해 보았지만 그 뜻도 모르고 그렇게 살지도 못하였다. 그저 자기 나름으로 알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한 수준에서 편의적인 논리를 세우고 있으니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을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