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님, 미안합니다! 이 닭들은 모두 제 아내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저 코코넛도 빠빠냐도 모두 아내의 것이지요. 저 쪽에 있는 바나나 나무가 제 것인데 모두 따 먹고 아무 것도 없어요. 제가 선교사님에게 드리고 싶지만 드릴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한 한국인 선교사가 정글에 있는 사람들에게 초대를 받아 복음을 전하러 갔다. 서부 아프리카 가나에 있는 쿠마시라는 도시에서 일곱 시간 걸려 아카탄부라라는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아카탄부라는 깊은 정글 가운데 나무와 풀로 엮은 집이 사오십 호 되는 작은 마을이다. 집 주인인 아사무아가 몇 달 전에 가나 아크라에 와서 복음을 듣고 돌아간 뒤 다시 그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한국인 선교사 내외를 초청한 것이다.
같은 아프리카지만 정글 안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옷을 입지 않았고 옷을 입었다는 학생들은 다 떨어진 사시사철용 옷이다. 식수는 흙탕물인 도랑물이 전부고 거기서는 빗물이 제일 좋은 음료수다. 그래서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비만 오면 집 안에 있는 모든 그릇들을 내다 놓고 빗물을 받는다. 마을에는 크고 작은 벌레들이 가득하며, 집 안에 그 무서운 체체파리가 자주 날아온다. 이런 정글에 사는 원주민들이 선교사가 왔다고 밤마다 모임을 가진다. 그들은 밤늦도록 서툰 부족어로 말하는 한국인 선교사의 설교를 들으며 함께 노래도 부른다. 그곳 주민들은 먼 길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에게 찾아와 말씀을 전해주는 것을 기뻐하면서 선교사에게 코코넛, 바나나, 빠빠냐 같은 열매들을 가지고 온다. 어떤 사람은 정글에서 가장 귀중한 닭을 잡아서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들고 온다. 그 동네에 잠시나마 행복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선교사를 초대한 아사무아는 아무것도 주질 않았다. 어느 날 밤, 집회를 마치고 모든 사람이 돌아간 뒤에 아사무아가 조용히 입을 열어 자기가 선교사에게 닭이나 과일을 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자기 집에 있는 모든 것이 아내의 것이고 자기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카탄부라에 사는 사람들은 부부여도 내 것, 네 것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다. 부부라고 부르지만, 남편이 굶어도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생각을 해본다.
‘바나나가 얼마나 한다고! 다 해도 십 불어치도 안 되는 그것 때문에 부부가 네 것, 내 것 하고 갈라지는가? 그게 무슨 부부야!’
아프리카 정글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라는 단어를 모른다. 내 집, 내 코코넛, 내 망고... 다만 ‘나’만 존재하지 그들에게는 ‘우리’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부부지만 ‘우리’가 아니고 나와 내 아내로 구분되어 있다. 몇 푼 안 되는 코코넛, 빠빠냐, 닭 때문에 가장 귀중한 남편을 나와 하나로 만들지 못하고 둘로 갈라놓은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우리’라는 단어를 즐겨 써 왔다. 우리 동네, 우리 집, 우리 아들,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요즘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나’를 세우려는 강한 욕망이 일어나면서 나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귀한 ‘우리’가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 한 가운데서 고독을 느끼는 것도, 혼자 괴로워하며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것도, ‘나’만 존재하는 삶의 결과인 것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우리’를 귀중히 여기며 ‘우리’를 위해서 ‘나’를 허물 수 있다면 얼마나 내 삶이 더 행복해지고 얼마나 더 기뻐질까! 형제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친구의 즐거움이 내 즐거움이 된다면, 이웃의 행복에 나도 젖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우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