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 젊은 선비가 있었다. 해가 기울고 밤이 깊어져 묵을 곳을 찾아야 했는데, 뜻밖에 산중에 불빛이 있어 가보니 큰 기와집이 나온 것이었다. 문을 두드렸는데, 낭자가 등불을 들고 문을 열어주었다.
“과객이올시다. 오늘 밤에 묵고 갈 수 있는지요?”
“예, 누추하지만 쉬었다 가시지요.”
낭자는 방으로 안내했고, 좀 있으니 저녁상을 차려온 것이었다. 따뜻한 밥, 정갈스런 반찬들을 보니 군침이 절로 넘어갔다.
“찬이 없지만 요기나 하시지요”
호롱불빛으로 보이는 낭자의 예쁜 얼굴과 얌전한 자태는 선비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이런 낭자가 이런 곳에 살고 있다니, 내 과거 합격하면 내려오는 길에 청혼을 하리라.’
식사를 마친 후, 낭자는 상을 내갔는데 고운 한복의 뒷모습 역시 아름다웠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치마 사이로 뭔가가 비집고 나온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다가 젊은 선비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건 여우 꼬리였던 것이다.
속이 느글거렸고, 등줄기에 식은 땀이 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텐데!’ 하는 마음뿐이었다.
어린 시절에 자주 들은 옛날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얼굴이나 자태를 보면 정말 빼어난 미인이어서 청혼하고 싶었지만, 뒤에 치마 사이로 삐져 나온 꼬리가 낭자의 정체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에게 접근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모습이지 본질적인 모습이 아니다. 마치 술 광고에서 예쁜 여자가 보기 좋게 술잔을 든 모습이 나오지, 술로 인해 건강을 해치고 경제적으로 파탄 난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담배 피우다가 폐암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인공호흡기를 끼고 고통스럽게 호흡하는 모습’을 담배 광고로 제작하는 담배회사를 본 적이 있는가?
우리를 위한다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다 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우리를 이용하려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말이 얼마나 그럴듯하며 아름답냐’가 아니라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며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낭자의 정체가 아닌 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늘 나를 위한다. ‘좀더 즐겁게, 좀더 편안하게, 좀더 안전하게.’ 그러나 그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괴로움으로 파멸과 위험으로 끝나곤 한다. 성경은 ‘나’라는 존재,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의 본질을 보여준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끌리어 사망에 이끌리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를 한번 보아야 한다. 그래야 나를 벗어나고 나를 부인할 마음을 갖게 된다. 그때에 나 아닌 진리를 믿고 의지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