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임금님의 아들을 낳았는데 왜 이렇게 잠잠하게 있습니까?”
“저는 제가 뛰어나서 아들을 낳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을 뿐입니다.”
“다른 후궁들은 저렇게 임금님의 총애를 받고자 애쓰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에 비해 비천한 여인일 뿐입니다. 이대로도 참 감사합니다.”
전국 시대 말기 위나라에 박희라는 미녀가 있었다. 그녀는 당시 위공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위나라가 유방에게 멸망당하자 졸지에 궁중에서 비단을 짜는 천한 신분을 내려앉고 말았다.
그런데 박희의 타고난 미모가 호색한이었던 유방의 눈에 띄어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유방에게는 후궁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박희였지만 다른 후궁들에게 밀려 금방 잊혀지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유방은 두 미녀를 거느리고 정자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런데 두 미녀가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소근거리며 깔깔 웃었다. 유방이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 미녀가 대답했다.
“황공합니다. 폐하. 실은 후궁들이 누가 먼저 폐하의 총애를 받나 내기를 한 적이 있었사옵니다. 그때 박희는 함께하지 않았는데 지금 박희의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마음이 즐거워서 웃었사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유방은 그제야 아름다운 박희를 떠올리고는 그날로 그녀와 동침하였다. 그 하룻밤의 연으로 박희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왕의 옆에서 사랑을 받고 미모를 뽐낸 후궁들은 모두 잡아들여라! 내 엄벌로 다스리리라!”
훗날 유방이 죽은 후 권력을 쥔 황후 여씨는 남편의 사랑을 빼앗았던 후궁들에게 잔인한 복수를 시작하였다. 유방이 지극히 사랑했던 척희는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았으며 벙어리에 귀머거리까지 만들어서는 항아리에 넣고 침을 뱉으며 즐거워했다. 나머지 후궁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박희는 비록 아들을 낳았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있었기에 여태후의 눈에 띄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갖은 폭정을 일삼던 희대의 여걸 여태후가 죽자 신하들은 박희의 소생인 항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다.
욕심 부리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달관한 삶을 살았던 박희는 이렇게 해서 위기를 넘기고 태후의 자리까지 올랐다. 만일 그녀가 유방의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사랑을 욕심냈더라면 악랄한 여태후의 손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마음을 비우면 복은 저절로 들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