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브사와 에이이치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사절단으로 참석하여 발달된 서구문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그곳에 잔류하여 유럽 상공업의 발달상을 관찰하였고, 벨기에를 방문하여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접견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철강이 발달했는데, 우리나라 철강을 쓰면 당신네 나라 산업이 빨리, 그리고 크게 발전할 거요.”
그것 역시 시브사와를 놀라게 했다. 유교적 전통을 가진 동양에서는 일찍이 상업이나 공업은 천시되는 업이었는데, 유럽에서는 국왕까지 나서서 판촉을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브사와는 큰 감명을 받고 돌아와 메이지 정부에서 재무 대신을 하면서 전폭적인 문호개방과 상공업 진흥정책을 썼다. 화폐를 발행하고 정부차원에서 외국의 기계, 플랜트, 기술자를 도입하여 산업을 일으켰고, 민간인에게 경영을 맡겼다.
메이지 정부의 핵심관료로 일하던 그가 어느 날 돌연 사퇴를 하고 기업가로 전향했다. 불과 몇 년 전가지만 해도 유학자로 유교 경전을 외는 동양적인 관료였던 그가 사회적으로 천시하는 상인의 길로 길을 바꾼 것이다. 천황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전도유망한 고관(高官)이 하루아침에 장사꾼으로 돌변한 것은 일대 화제가 되며 세인을 경악케 했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상공업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주식은행’을 설립했으며, 해운, 조선, 철도, 방직 등 평생 수백 개의 기업을 창설하며 경영의 일선에 나서 일본 근대화의 기수가 되었고, 일본 기업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으며, 일본인들이 실리(實利)를 중시하여 서구문명을 모방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내적 기반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걸어간 길이 한 나라에, 역사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는가’하는 명제가 시브사와 에이이치의 생애를 통해 깊이 와 닿는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꾼 지도자가 사회를 바꾸며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