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세계의 위대한 미술 50선 ( 4 ) 얀 반 야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1)

by eknews posted Apr 0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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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vaneyck.jpg 

<1434,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82.2 (panel 84.5) cm×60 (panel 62.5) cm (32.4 in ×23.6 in)>


한 장의 그림으로 때로는 당시 사회의 경제와 정치 그리고 무역, 산업, 결혼 풍습, 복식사, 사회배경 이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플랑드르 지역은 중세의 유명한 양모 생산지로써 상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예술에 뛰어난 민족인 플래미쉬(flemish)가 살고 있었습니다.
‘프란다스의 개’ 의 목동으로 등장하는 네로도 플래미쉬입니다. 네로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그림을 그린 루벤스도 역시 플랑드르 사람인 플래미쉬 입니다. 지금도 벨기에인의 절반이 이 플래미쉬 종족으로 이들은 유럽에 약 2천 만명 정도가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찍부터 무역과 상공업을 하며 진보적인 사고와 예술적 감각을 키웠고, 이 덕분에 많은 화가와 음악가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루벤스와 영국 찰스 왕의 궁정화가였던 반 다이크도 플래미쉬이고, 음악의 화음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 사용한 사람들도 바로 이 플래미쉬들입니다. 북구 르네상스의 기수였던 얀 반 에이크(1395~1441)는 형인 휴베르트 반 에이크와 함께 플랑드르 화파(플레미쉬 화단)을 리드해 나간 아주 중요한 화가입니다. 그는 형인 휴베르트와 함께 처음으로 오일 칼라를(유화물감) 사용한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색채가 강한 광물이나 식물 등을 가공해서 물감의 원료인 안료를 직접 마련하였으며 그것을 주로 계란에 섞어 사용하였습니다. 이 같은 재료를 템페라(tempera)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지만 계란에 섞은 물감은 빨리 마르고 입자가 굵고 거칠어 섬세한 묘사를 할 수 없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와 달리 플랑드르 지역은 건물이 작고 공간이 넉넉하지 않아 작은 그림이 많이 그려졌습니다. 이 작은 그림에 요구되는 섬세한 묘사를 하기에는 템페라 물감이 적절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들은 안료에 기름을 섞은 오일 칼라를 만들게 됩니다.
이 오일 칼라가 발명되고 쓰는 방법이 널리 퍼지면서 미술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로 그림이 섬세해지고 정교해지며 내용이 풍부해 졌습니다. 둘째는 더 이상 제작하기 힘들고 값비싼 나무화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무 판을 화판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잘 건조시킨 나무판을 세 겹 이상 휘지 않게 서로 겹겹이 붙인 다음, 표면에 나무를 붙인 자국을 감춰서 미끈한 하나의 판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1미터가 넘는 판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한 3개 이상의 판자를 세 겹이나 붙이고 붙인 자국을 감쪽같이 감추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일 칼라를 사용하면서부터 나무판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고, 천에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값싼 천으로 만든 캔버스를 사용하게 됨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절약되었지만 그림 값도 저렴해 집니다. 이로 인해 경제력이 있는 일반인들도 그림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미술이 특정한 권력자나 교회 종교 단체만의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개방되는 혁명적 전환점이 열립니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Jan van Eyck. Arnolfini and his wife)의 그림은 바로 이 같은 미술 시장의 개방과 고객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아주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당시 다른 미술과 달리 개인이 주문한, 평범한 사람의 생활을 주제로 담은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 그림을 화가가 그리기 위해선 조수의 도움을 얻어서 최소한 3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그림을 주문한 아르놀피니는 화가에게 고액을 지불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기의 결혼식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기 위해 이런 고액을 지불했다는 것은 그가 결혼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장의 그림으로 알 수 있는 그림 밖의 사실들이 그림을 그린 곳은 당시 플랑드르와 지역의 양모 무역 도시(지금 벨기에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브러지)입니다. 그러나 그림의 주인공 아르놀피니는 플래미쉬가 아닌 이탈리아인 입니다.
그는 메디치 은행의 지점장으로 당시 플랑드르 지역에 파견되어 재정 고문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것은 거의 6백년 전인데 이 때 무역이 활성화되고 메디치 은행에서 유럽의 여러 지역에 지점을 내고 국제 금융을 했다는 사실도 이 한 장의 그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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