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스템과 신뢰의 구축
18세기 이후 근대적 의미의 경제학이 자리 잡으면서 끊임없이 탐구한 명제 중 하나가 바로 가치(Value)의 발생이다.
즉 어떠한 대상이 가지는 정확한 가치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어떤 것은 그 사물 자체에 내재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교환을 통해 점차 증대되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이러한 가치의 본질에는 인간의 노동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기도 했다.
이러한 가치에 대한 근원을 따지다 보니 다양한 학파와 학설도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어떤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의 존재 유무다.
그것이 서비스가 되었던, 재화가 되었던 간에 말이다.
하지만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금융 시스템이 확립되면서 이러한 가치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즉 ‘신용’ 혹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가치의 증식이다.
처음에 금융은 재화의 생산을 돕는 보조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파생적 가치’가 형성되면서
금융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단칼에 정의내리기 모호한 존재는 21세기 들어 경제시스템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금융산업이 발전한 나라들은 대부분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가 잘 형성된 국가들이다.
이탈리아를 대상으로 한 ‘금융 발전 과정에서의 사회적 자본의 역할’이라는 2004년 논문에서는 신뢰가 낮은 남부지역보다
북부 지역이 주식시장, 은행업 등 금융산업이 전반적으로 발달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실제 금융은 신용을 바탕으로 무한급수적으로 그 가치를 파생시킨다.
이러한 금융의 본질에는 ‘재화’와 ‘신뢰’ 이 두 가지 밖에 없으며, 이를 바탕으로 경제시스템 전반을 흘러다닌다.
이런 금융의 본질에 대한 단적인 실례가 바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다.
따라서 신뢰를 상실한 금융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한 경제공동체 구석구석에 금융시스템이 핏줄처럼
퍼져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본질을 망각한 금융시스템은 오히려 한 사회의 경제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갈 수도 있다.
따라서 신뢰의 형성이 아직 미숙한 사회라면 금융감독 시스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사회의 신뢰 수준과 감독기관의 업무 태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부산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받기 전날 은행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소위 ‘VIP' 고객들에게 사전 인출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반 예금자와 VIP를 차별할 수도, 해서도 안되는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도 문제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신뢰의 파괴를
막아야할 금융감독원도 이러한 불법적 행위를 감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
지난 2월 16일 오후 8시경 금감원은 부산저축은행에 무단 예금 인출 금지 공문을 보낸다.
하지만 3시부터 이미 대부분의 VIP고객들은 자신들의 예금을 모두 인출한 뒤였다.
또 공문도착 이후에도 이러한 불법 인출은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출을 막아야 할 금감원은 자신들의 업무 태만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공문을 발송한 사실이 없다며
거짓말로 일관하다 검찰의 조사 결과가 공개되면서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인정하고 만다.
신뢰와 감독이라는 금융감독원의 존재이유마저 무색케 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금융당국의 이러한 태도는 전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불신은 정권 자체에도 번지고 있다.
사실 금융당국의 이러한 무능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금융사를 감시하고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원 직원들이 퇴직 후 해당 금융사로 ‘영전’하고 금감원의 직원들의 비리사건은
늘상 언론에 오르내린다.
게다가 올해 들어 영업정지된 7개 저축은행 중 3개 저축은행 감사가 금감원 출신이라는 점은 충격적이다.
최근 금감원은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특별 교육을 실시할 정도로 조직의 위기감이 높다.
또 영업정지와 관련한 정보가 새어나간 점에 대해 자체조사하겠다고 밝히면서 자체 개혁안을 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해 당사자가 개혁안을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금감원의 개혁에 앞서야 할 것은 바로 우리 경제 시스템에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다.
신뢰가 자발적으로 형성되지 못한다면, 그 대안으로 수많은 견제와 교차된 감시 시스템을 통해서라도 보완해야 한다.
애초부터 감독기능을 한 군데로 몰아 넣은 것 자체가 현 정부의 금융시스템에 대한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으면 그 첫단추부터 풀어야 한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