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에서 중국 북경까지 손선혜의 실크로드 북로 탐사기 (11)
긴회랑은 호화스러움이 극에 달했던 서태후가 뜨거운 해나 비를 피하는 산책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이 긴 회랑은 728m의 긴 복도로 천장과 난간에는 서유기, 삼국지 등의 내용이 그림으로 표현 되어 있으며 대들보에는 화조와 강남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모두 14,000여개인데 같은 그림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회랑에서 서쪽으로 가면 배운전이 있는데 구름을 치우는 전당이라는 뜻이다. 서태후가 생일축하연을 하던 곳으로 Dutch 화가인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그린 서태후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곳에서 급경사의 긴 계단을 올라가면 이화원에서 가장 큰 건물인 불향각이 있다. 육각형의 불전으로 높이는 41m이며 4중 처마를 한 목조건물이다. 불향각에서 내려다 보면 공원 전체가 다 보인다. 불향각 북쪽에는 130년전의 소주거리를 재현한 소주가가 있는데 서태후가 피난시절에 일반시민들이 상거래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보고 훗날 황실에 들어와 360m나 되는 거리에 64개의 점포를 만들어 궁녀들을 상인과 손님으로 변장시켜 상거래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조금 더 가면 황제들이 낙시를 즐기던 해취원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음악 공연장이었던 청려관이 나온다. 서태후는 비오는 날이면 이곳에서 식사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청려관의 서쪽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움직이지 않는 배가 있다. 창문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되어있어 아름다우며 서태후는 여기에서 달구경을 하며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동궁문 주위에는 서태후와 광서제가 대신들과 정사를 돌보던 인수전, 광서제가 거처로 했던 옥란당, 서태후가 머물던 낙수당이 있다. 광서제는 무술정변 이후 서태후에 의해 옥란당에 10여년간 갇혀 있다가 1908년 한 많은 생을 마쳤고 옥란당 뒤에 광서제의 황후 융유가 머물던 의예관이 있는데 서태후는 옥란당과 의예관의 통로를 막아 광서제와 융유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서태후가 머물던 낙수당에서 서태후는 하루에 두차례의 식사를 했는데 끼마다 주식 60여종류, 빵이 30여 가지가 넘었으며 서태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1000명에 달했다고한다.
서태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비천한 출신으로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된 서태후는 함풍제가 죽고 친아들 동치제를 6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시켜 섭정을 시작한다. 1875년 아들 동치제가 죽자 야망이 컸던 서태후는 3살된 조카(여동생의 아들)를 옹립하여 광서제로 즉위시켜 섭정을 계속한다. 청조의 11대 황제가 된 광서제는 16세가 되었을때 친히 나라를 다스려 보려했다. 서태후가 실권을 쥐고 있고 황실의 부정부패가 점점 더 심해짐으로 광서제는 정치실권을 잡기위해 1898년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무술변법을 실시한다. 이에 서태후는 수구파인 관료들을 설득하여 무술정변을 일으켜 100일만에 광서제의 시도를 꺽고 그를 옥란당에 유폐시킨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황실이 서안으로 피신할때 황제가 사랑하던 진비를 우물에 빠트려 죽인다. 1901년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진보적인 개혁을 시도했으나 나라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국고를 털어 개인의 용도로 사용하는 서태후의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을 나라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8년 광서제는 한 많은 황제의 생을 마감하고 그 다음날 서태후도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일설에 의하면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곤명호 한 가운데에는 남호도라는 섬이 있는데 7개의 아취가 있는 이 다리는 백년 전에 지어진 다리로 길이는 150m, 폭이 8m이며 난간에는 150여개의 사자상이 각각 다른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이화원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건물이 있어 하루에 다 구경하기가 힘들다.
너무 더운 날씨에 너무 많은 구경거리와 너무 넓은 이화원을 돌아 보고 나니 무척 피곤하다. 피곤할 때에는 입맛에 맞는 음식이 피로회복에 제일 좋다는 생각에 호텔 옆에있는 식당, ‘장백산 신선로집’에 가서 비빔밥을 먹다. 흑룡강 근처에서 온 주인 아줌마는 최근 대구에 사는 남자분과 재혼하고 신랑이 중국으로 올 날을 기다리며 뜨개질을 하고 있다. 35도의 더위에 신랑에게 줄 세타를 짜고 있는 아줌마가 행복해 보인다. 종업원들은 젊은 아가씨들인데 한국말을 잘 못하고 50이 넘어 보이는 아줌마는 이북 사투리로 한국말을 썩 잘한다. 아침이면 택시도 잡아 주고 택시값도 미리 흥정해 주는 등 내게 많은 도움을 주다.
거리에서 옥수수빵을 사서 아침으로 먹고 트럭으로 시마대(Simatai)만리장성에 가다. ‘달에서도 보이는 지구 유일의 인조 건축물’이라는 만리장성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7세기)에 쌓기 시작해서 2000년 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총 길이가 6700km이다. 해가 너무 뜨거워 모자를 사서 써야만 하다. 30분 정도 계곡을 타고 등산을 하니 시마대장성의 높은 망루가 나오고 급경사의 돌계단을 2시간 걸려 오르니 제일 높은 망루가 나온다. 천하가 발아래에 있다. 35도의 더위에 2시간 반의 등산을 하니 지참했던 2리터의 물이 모자란다.
몇년 전에 가 보았던 만리장성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가 본다는 장성으로 북경에서 북서쪽으로 85km 떨어진 팔달령(Badaling)장성이다. 가는 길에는 주공관령이있고 또 구비구비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산들을 넘고 또 넘으면 팔달령이 나온다. 최고봉은 해발 1km이고 성벽 높이는 7.8m 폭은 하단이 6.5m, 상단이 5.7m로 10명이 횡대로 걸을 수 있는 폭이다. 성벽 위의 벽은 2m높이인데 요철모양이고 돌계단 하나하나가 높으며 올라갈 수록 경사가 급하다. 3,4백미터의 간격으로 2층의 망루가 있는데 윗층은 공격하는 망루, 아래층은 병사들이 쉬거나 무기를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다.
호텔의 주위에 있는 시장을 산보하며 조그만 공터에서 아침체조를 하는 시민들을 구경하다. 다리가 뻐근하지만 북경에서의 마지막 날에는 북경의 북동쪽에 있는 라마사원(Yonghe Gong)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북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존이 제일 잘 되어있다는 곳이다. 1694년에 지어진 곳으로 용정이 황태자였던 시절에 거처하던 곳이다. 황제가 된 후 사원의 용도로만 쓰였다고 한다. 시내에서 가깝고 예쁜 절에 절내의 아늑한 분위기 때문인지 젊은 쌍쌍이 데이트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중국여행중에 중국교통수단을 모두 이용해 볼 생각을 해두었던 참이라 기차만 빼놓고 다 시도해 보려는 계획을 마지막 목적지인 북경에서 실행하다. 북경의 교통수단은 무궤도전차, 버스, 택시, 지하철, 인력거, 미니버스, 투어버스, 자전거다. 자전거는 공해가 없고 운동도 되니 참 좋은 교통수단이다. 물밀듯 줄지어 타는 자전거 행렬은 보기에도 아름다울 정도다. 특히 비올때 여러명이 여러가지 색의 우비를 걸치고 스르르 미끄러져 가듯 소리없이 굴러가는 모습이 유난히 우아해 보인다. 중국의 어느 도시에 가던 자전거는 아주 중요한 서민들의 교통수단이다.
일행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 날의 술과 춤이 곁들인 만찬은 8주간의 여행담으로 즐겁기도 하고 헤어지는 서운함이 교차하는 밤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영국과 덴마크에서 온 일행과 모두 우리집에서 모여 내가 찍은 비디오 시사회를 하기로 하다. 근자에 남편을 앞서 보낸 친구의 눈물도 보기에 애처롭고 갑자기 찾아 온 듯한 마지막 날이라는 것에 아쉽고 섭섭한 마음 그지없다. 내일이면 지난 8주간의 여행이 꿈속의 일 처럼 생각될 것이다. 더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산천, 무엇인가 보이지 않으나 보일것 같고 죽어 있는 것 같으나 살아 있는 것 같은 광활한 사막, 빙하를 건너던 일, 지도 한장을 들고 문화유적지를 찾아 다니던 시간, 사막 위로 해뜨고, 해지는 장관,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달 밤, 별들이 쏟아져 내리던 밤, 비소리가 곱던 때, 시하허에서 본 인생의 번뇌를 떨치는 기도의 행렬, 죽어서도 살고 싶어 하던 황제, 2000년에 걸쳐 수만의 희생 위에 세워진 만리장성, 발바닥을 뜨거운 모래에 디었던 명사산과 그 장엄한 모습, 매일이 새로운 만남이었고 감동의 연속이었던 지난 8주간이다. 이제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을 떨 칠 수가 없다. 볼륨 높은 음악에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을 뒤로하고 거리의 소음 속으로 나가다. 이렇게 장장 8500 km의 트럭 트레킹과 머물던 곳곳에서 이용한 인력거, 택시, 버스, 보트로 달린 거리를 합하면 10000 km가 족히 넘는 실크로드 탐사 여행이 끝나다.
재영 한인동포 자유기고가 손선혜
유로저널 칼럼리스트
ommasdream@hanmail.net
위의 글은 재영한인 손선혜씨가 7주 동안 파키스탄에서 중국 북경까지 실크로드 북로를 따라 트럭을 타고 직접 다녀온 탐사기를 유로저널 독자들을 위하여 기고한 내용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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