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메병원 지은 뒤 정신지체인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싶어
지난 11월 14일에는 푸르메재단의 이사장인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이 파라다이스 복지 재단에서 수여하는 파라다이스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김성수 이사장은 평생을 장애인을 위해 헌신해 온 분으로 국내 최초의 정신지체 특수학교인 <성베드로 학교>, 금융소외계층의 자립기반을 위한 <사회연대은행> 등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의 아버지로 오랫동안 존경을 받아왔다.
이번 파라다이스상의 상금 4천만 원 중 절반인 2천만원을 푸르메재단에 기부했다. 유로저널에서 김성수 총장을 만나봤다.
김 총장님은 2005년부터 <푸르메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장애 환자의 새로운 터전인 민간 재활전문병원을 건립하는 데 온 힘을 쏟고 계시다. 이제 내일 모레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 누구보다 젊으시다.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김성수 총장님을 대하면 삶의 의욕이 솟아나고, 마음에는 평화가 생기고, 무언가 주위사람과 나누고 싶어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한평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나누는 삶을 실천해 오고 계시기 때문이다. 김성수 총장님께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낡은 중절모를 보여주신다.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꿰맨 자국이 선명하다. “10여 년 전 동생이 선물로 사준 겁니다. 애정이 담긴 선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Q : 먼저 유로저널 독자와 유럽동포들에게 인사를 해주시죠?
A : 너무 반갑습니다. 멀리 서구유럽에서 생활하시는 여러분께 자랑스러운 마음을 보냅니다. 저도 젊은 시절 쑥스럽지만 영국에 유학했기 때문에 이국에서 사는 고통을 압니다.
여러분 때문에 한국이 더 알려지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모쪼록 조국에 대해서 자부심과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Q : 총장으로 취임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A : 올해로 6년째입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7년간 성공회대 이사장을 지낸 뒤 강화 도 온수리에 있는 장애인 직업공동체 <우리마을>을 만들었어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2000년 총장에 취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Q : <성베드로학교>와 <우리마을>이야기를 해주시지요.
A : 1995년 은퇴를 하면서 <성베드로학교>의 명예교장이 되었습니다. 정신지체 어린이들이 공부할 곳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졸업하자 생활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 온수리에 직업생활을 할 수 있는 <우리마을>을 만든 거지요. 경기도에서 30억원을 지원해줘서 설립 이 가능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지요.
현재는 이곳에서 정신지체장애인 30여 명이 생활 하고 있고 바로 옆에는 수녀원이 생겨서 나이든 노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Q : 사제의 길을 어떻게 걷게 되셨나요?
A : 젊은 시절 폐병을 앓았는데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몸을 혹사해서 지금쯤 죽었을 지 몰라요. 병에 걸린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담배와 술을 안하고 항상 조심해왔으니 이렇게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지요.
어려서 서울 관수동으로 이사를 왔다가 가회동에서 자랐어요. 배재중학을 다녔어요. 공부는 안하고 매일 아이스하키를 열심히 했어요. 내가 배재중학 아이스하키 선수였거든요. 한번은 대회에 출전해 열심히 시합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각혈이 나오더라고요. 폐결핵이었어요.
과로 탓이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6.25전쟁이 터진 거지요. 그때 폐결핵에 필요한 마이신 한 알을 사먹으려면 쌀 한 가마니 값이었는데 내 약값을 대느 라 집 재산이 많이 축났습니다. 아무튼 10년 동안 병치레를 했어요. 우리 집에 폐병환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인민군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내가 아이들을 워낙 좋아해서 병이 조금 낫자 인근 고아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자연스럽게 성 공회와 인연을 맺은 거지요.
사제가 돼야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걷게 된 겁니다. 아픈 동안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고 현재도 갚고 있는데 살아생전에 갚을지 걱정이 돼요.
Q : 사시면서 어려움이 많으셨지요?
A : 아시다시피 제 아내가 영국사람입니다. 영국 성공회 전도사로 파견돼 일본에 왔다가 저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혼혈아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영국이나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을 텐데. 돈이 없어서 모두 국내에서 공부를 시켰어요. 둘 다 혼혈이니 학교생활이 쉽지 않았지요.
딸은 그래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아들은 달랐어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들과 많이 싸웠습니다.
여의도에서 아무개하면 주먹으로 유명하지요. 그때마다 “네 조국은 한국이고, 넌 한국놈이니까, 꼭 군대에 가야한다”고 강조했어요. 그런데 막상 아들이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받으니까 혼혈이라서 갈 수 없다는 거지요. 제가 “넌 한국인이고 군대에 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아들이 “왜 나는 군대에 갈 수 없느냐”고 대들더군요. 그 때 처음으로 “아빠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저는 아이들 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요를 했지만 집사람은 아이들의 뜻을 존중해 스스로 느낄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갈등을 겪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교육철학이 옳았던 것 같아요.
Q :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
A :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장애인들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푸르메재단>이 꿈꾸는 아름다운 재활병원이 하루빨리 지어졌으면 해요. 이러려면 지금까지는 일반 시민들이 많이 지원을 해주셨는데 앞으로는 시민은 물론 대기업과 정치인들이 정말 내 일처럼 나서고 도와줘야 합니다.
남은 임기가 끝나면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살고 있는 <우리마을>에 가서 여생을 보내려고 합니다.
김성수 총장님은 연세대 신학과를 거쳐 성공회 성미카엘 신학원을 졸업한 1964년 사제 서품을 받으셨으니 신부가 되신 것이 올해 42년째다. 이후 장애인을 위해 외길 인생을 살아오셨다. 때로는 장애인들에게 허물없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장애 환자에게 인자한 할아버지가 됐다가, 때로는 엄한 아버지 역할을 했다. 김 총장님은 1973년 국내 최초의 정신지체장애 어린이 기숙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세우셨다.
이들이 졸업한 뒤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유산으로 받으신 강화도 온수리 선영을 기부해 정신지체장애인 직업생활공동체인 <우리마을>을 만드셨다. 그리고 현재는 푸르메재단이 꿈꾸는 병원을 세우기위해 애쓰고 계시다.
유로저널 특별 인터뷰팀
안 재열 기자,박 승근 수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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