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억류 신숙자씨 모녀 구출 촉구 서명운동
재유럽한인총연합회(회장: 김 훈)는 1985년 독일 거주 중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정치범 수용소를 거쳐
모처에 억류 중인 것으로 알려진 경남 통영 출신 신숙자씨 모녀의 조기 송환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범
재유럽 한인 차원에서 실시합니다. 재독 동포이자 재유럽 한인동포인 신숙자씨 모녀의 구출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재유럽 한인 여러분들의 동참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현지인들에게도 설명하여
동참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재유럽한인총연합회는 재유럽 한인들의 염원을 담은 서명 결과를 토대로 유럽연합(EU) 인권위원회에
전달하여 EU 차원에서 정식 조사 요청 및 깊은 관심을 촉구할 계획입니다.
서명 방법
1,WWW.EKNEWS.NET 의 오른쪽 중간에 "북한 억류 신숙자씨 모녀 구출 촉구 서명운동"을 방문
하시여 서명자 희망자의 거주국명,이름,주소,전화번호,메일 주소를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2,유럽 내 각국의 재유럽한인총연합회 임원들이 행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연락처 및 문의처: 재유럽한인총연합회 +44 208 949 3555/ +44 786 8755 848 ,
E-Mail : euko2011@hotmail.com
- 재유럽 한인 총 연합회
* 아래 편지는 신숙자씨의 남편인 오길남 박사가 신숙자씨 모녀 구출울 위해 1992년 9월에 각계에 보낸 내용입니다.
“북에 가는 순간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처와 두 딸은 의사와 상관없이 북한에 억류돼 있습니다.
생사 여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가족을 다시 만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호소합니다”
나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나의 처 신숙자(50)와 딸 혜원(16)·규원(14)이 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국제
인권단체의 많은 도움이 있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나는 1942년 3월 11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인 부산에서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2년 국립 서울대학교 독어독문과에 입학하여 1969년 동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 저는 서울에 있는 독일문화원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 서울 지부장인 독일인 에리흐홀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아 1970년 10월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독일 튀빙겐에 있는 튀빙겐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1976년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튀빙겐대학 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신숙자(현재 재북 중)와 결혼하여 두 명의 딸을 두게 되었습니다.
큰딸 혜원은 1976년 9월 17일, 독일 킬에서 태어나 킬 근교 크론스하겐에 있는 그림형제(Bruder Grimm)라는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둘째딸 규원은 1978년 6월 21일, 역시 독일 킬에서 태어나 언니와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나는 독일에서 1974년 3월부터 독일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반한단체인 ‘민건회’에
가입하여 그 구성원들로부터 한국이 독재 정치를 하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1980년 3월 독일 정부에 망명을
하였습니다. 독일 유학 15년이 되던 해인 1985년, 나는 브레멘대학에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과 생산가격
이론의 재구성’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는 했지만, 나이가 43세나 되어 쉽게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고, 국내에 들어와 대학교수로서
일할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과거 ‘민건회’라는 반한단체에서 활동했던 경력 때문에 신변에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귀국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교통사고를 일으켜 부상을 당한 데다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혈액을 취급하다 간염에 걸려 휴직 상태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평소 친하게 지냈던 야채상 김종한(52)으로부터 “북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나는 북한 체제가 나의 전공인 마르크스 경제학과 깊은 연관이 있고,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일해 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독일에 있는 유명한 음악가인 윤이상(75)으로부터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당신의
해박한 지식을 북에 가서 활용해 주기 바란다’는 서신을 받고 입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종한의 소개로 동독 주재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는(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 백 서기관이란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북한에 가서 경제학자로서 일하게 되면 메르세데스 고급 승용차도 제공받고 여러 가지 연구 활동이 보장
되며 봉급도 많이 받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백 서기관에게 “나는 마르크스 경제학 추종자로서
북한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북한에 가서 일해 보겠다”고 입북할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북행하기 직전인 1985년
11월 말경 처와 입북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처음에는 처가 완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처에게 “우리의
어려운 살림 형편을 극복하고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과 간염을 앓고 있는 당신을 치료하려면 북한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라고 강력히 설득하였습니다.
그러자 반대하던 아내는 울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입북을
결정한 것 때문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를 자신은 북한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으나 아내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북한에 들어가서야 깨달았습니다.
1985년, 나와 처자는 대남 공작원인 백 서기관과 백치완(47)에게 독일 망명 여권을 맡기고, 대신 그들이 만들어 준
오경현이라는 가공인물의 북한 공무 여권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베를린과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으로 들어
갔던 것입니다. 나는 평양 근교에 있는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경제학자로서
일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우리 가족은 모두 평양 대동강 부근의 어느 깊은 산속에 있는 동북리초대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소위 밀봉 세뇌교육을 받으면서 김일성에게 충성을 강요당하는 인간
로봇으로 전락되어갔습니다. 3개월 동안 초대소에서 사상 세뇌교육을 받은 후, 평양시 흥부동에 있는 대남 흑색선전 방송국인
‘구국의 소리’ 방송 요원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곳은 그 방송이 남한 내에 실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거나 혹은 자진하여 월북한 많은 남한
출신자들이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북한 당국이 남한을 적화 통일하기 위해 만든 공작 기구였습니다. 허황된
거짓을 마치 남한 내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속여 북을 추종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남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1986년 6월부터 1986년 11월 북한을 탈출할 때까지 이 방송국에서 민영훈 교수라는 가명으로 ‘종속경제 비판’
등에 대해서 녹음하여 이를 남한으로 송출하였습니다. 이렇게 북한 당국은 입북하기 전에 나와 약속한 것과는 달리,
경제학자로서 일할 여건도 제공해 주지 않았으며, 철저하게 나의 개인 생활을 통제하고 나의 요구 또한 완벽하게 무시하며
기만하였습니다. 1986년 11월 25일 구국의 소리 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 북한 대남공작기구 책임자인 리창선(67·
현 사회문화부 부장)이 나에게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2명을 덴마크로 유인하여 대동 입북시켜라’라는 끔찍한
공작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집으로 돌아와 처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처는 저에게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곳이 못 되니 당신이 먼저 이곳(북한)을 탈출해 독일
정부에 호소하여 우리를 구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입북하기 직전까지 독일 망명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독일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6년 11월, 나는 사랑스러운 처와 귀여운 두 딸을 지옥과
같은 북한에 두고 나왔습니다. 독일 유학생 2명을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유인, 대동 입북하라는 공작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에게는 북한 요원 백치완 등 2명이 따라붙었습니다. 나는 북에서 만들어 준 오경현이라는 가명의 여권을 소지하고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 공항으로 침투 중, 공항 사열 요원들의 도움으로 동행한 북한 요원을 따돌리고 극적으로 탈출하여 독일로
돌아와 재정착하였습니다. 나는 북한을 탈출해서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대남 공작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이상을 만나 그에게 재북 가족을 송환시켜 줄 것을 수차에 걸쳐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1987년
10월과 1988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있는 처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처는 평양시 형제산 구역
형산리 8반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후 1991년 1월, 윤이상은 처자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 1개와 가족사진 6장을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윤이상은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제 고용 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다시 입북하여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통하여 재북 가족
송환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최후 수단으로 나의 조국인 한국에 들어가 당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1992년 4월 10일, 저는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에 자수하여 1992년 5월 22일 입국하였으며, 현재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조국에 귀국하기 전인 1992년 3월과 4월 사이에 독일에서 재북 가족의 안전과 송환을 위해 UN민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적십자사에 불쌍한 재북 가족을 송환해 달라는 간절한 내용의 호소문을 발송했습니다. 1992년 6월, 국제적십자사 홍콩지사로
부터 재북 가족의 근황을 알아보겠다는 연락이 왔을 뿐, 여타 기구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재북 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북한에 있는 나의 가족 신변에 위험이 따를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가족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사 여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나는 매일 밤마다 처와 두 딸의 생각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국제인권단체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나의 처와 두 딸은 지금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혹은 묵살당하면서
북한에 억류돼 있습니다. 사랑하는 처와 귀여운 두 딸을 다시 만나 내가 태어난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진심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1992년 9월 오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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