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나에게는 깨침이 없었습니다.
옛날의 나는 책 꽤나 읽었습니다. 어릴 때 동화책은 물론 수호지, 삼국지 등을 단행본이 아닌 전질(全帙)을 읽었고 고교시절에는 여름방학 때 ‘ㅇㅇ세계 문학전집(100권)’을 독파하기도 하였습니다. 직장에서도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료를 읽고 각국의 시스템과 정책 및 동향 등을 그때그때 지득(知得)하여야 하고 최신 학술이론을 계속 좇아서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늘 책을 읽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시간이 날 때에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신앙생활과 관련해서는 경전과 경전의 해설서라는 해설서는 두루 섭렵 하였습니다.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린 시절에는 당당하게 독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독서량이 많고 폭넓고 깊은 지식과 정보를 알고 있다고 자부(自負)하였습니다. 고교 시절에는 국내에 마땅한 음악해설서가 없어 음악해설서를 집필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고 경전에 관해서는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오만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독서량이 많아지다 보니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 보듯이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이 트이고 생각이 깊어 지혜로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근원적인 문제 –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등 – 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철학에서도 답을 찾지 못하였고 경전에 그 답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는 존재의 문제이어서 ‘아는 것’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존재의 문제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풀린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옛날의 ‘나’라는 존재는 허상의 거짓존재이기 때문에 ‘참’이 담겨있는 경전을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거짓존재에게는 거짓만 있어 ‘참’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참’의 존재가 되어야 ‘참’을 이야기한 경전을 알고 근원적인 문제가 풀린다(깨쳐진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거짓존재가 책을 제아무리 많이 읽는다 한들, 제아무리 궁리하고 연구해본들 그것이 지혜를 가리고 거짓을 더 두텁게 할 뿐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는 줄 몰랐습니다. 때가 끼인 유리창을 통해 보는 흐릿한 세상은 허상입니다. 그 흐릿한 세상에 갇혀있어서, 그러한 관념이 가로막고 있어서 유리창 너머의 밝은 참 세상을 이야기해주어도 도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흐릿한 유리창을 통해서 본 것과 흐릿한 세상을 알고 있는 존재를 다 버리고 흐릿한 유리창마저 깨부수어 없애면 밝은 참 세상이 그냥 드러나 ‘깨쳐서’ 알아지는 걸 몰랐습니다. 참의 존재가 되면 참이 깨쳐져서 참을 그냥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