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적에 만난 친구 성훈이에 대한 이야기 ‘친구’, 그리고 마포구 중동에 살면서 중암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만난 중학교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 ‘친구(2)’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볼까 한다.
아마 한국에서 대학까지 다닌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 남성들은 고등학교 친구들이 여럿 있을텐데, 나는 고등학교 친구가 단 두 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남고를 나왔음에도.
지난 ‘친구(2)’에서도 밝힌 것처럼 나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일산 신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중학교 친구들과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일산에도 고등학교가 몇 개 있었지만, 그 학교들이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생뚱맞게 서울에 있는 명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3년 동안 나는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서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명지고등학교를 통학했고, 이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고, 또 얻기도 했다.
잃은 것은 아무래도 먼 거리에서 통학을 하다 보니, 대부분이 인근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좀처럼 없었고, 상당한 통학 시간과 그에 따른 피로감에 늘 지쳐 있었다.
얻은 것은 그렇게 외로울 수 밖에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기타와 친해질 수 있었고, 또 영화, 음악, 연극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면서 급기야는 외로움을 즐기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렇게 지낸 고등학교 시절에도 다행히 너무나 좋은 두 명의 친구들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와 창원이와 경철이는 같은 반이었다. 경철이와는 앞 뒤 자리에 앉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점심을 같이 먹는 무리에 속하게 되었고,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 같다.
경철이는 어딘가 어른스러움이 있었고, 공부도 잘 하고, 당시 또래에 비해서는 참 이성적인 녀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철이는 남자 3형제 중 맏형이었다.
창원이와는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안에서, 당시만 해도 어지간한 영화광이 아니고서는 고등학생으로서는 빠져들기 힘든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본 경험을 공유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나는 당시 이 ‘중경삼림’을 어느 비오는 토요일에 지금은 없어진 종로 2가 코아아트홀에 혼자 가서 보고는 영화에 흠뻑 취해 돌아왔더랬다.
홍콩, 그리고 중국의 매력에 심취해있던 창원이는 경철이와는 반대로 위로 누나만 둘 있었고, 참 감성적인 녀석이었다.
우리 셋은 공통적으로 셋 다 참 차분한 녀석들이었고, 반에서 별로 튀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린 그렇게 친해져 갔다.
경철이는 연신내에 살았고, 창원이는 무악재에 살았는데, 고3 수능을 마치고 무악재 창원이네 집에 놀러가서 호프집을 갔다가 신분증을 까라고 해서 결국 소위 뺀치를 먹고서 노래방에 가서 차분한 남자 셋이서 청승맞게 발라드만 냅다 불러댔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어울려 논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또 창원이가 마침 일산 우리집과 도보로 10분 거리로 이사를 오면서부터였다.
금요일 저녁이면 경철이가 일산으로 놀러와서 셋이서 새벽까지 어울렸다.
당시 우리들이 밟는 코스(?)가 있었다.
1차는 늘 당시 내가 통기타 라이브 알바를 하던 생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통기타 라이브 알바는 원래 고 3 수능을 마치고 내가 아무 대가 없이도 그냥 무대에서 노래하는 게 좋아서 생맥주집 사장님에게 돈 안 받을 테니 노래를 하게 해 달라고 해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경철이와 창원이가 내가 노래하는 가게로 놀러왔던 어느 토요일 밤, 그 날은 유난히 손님도 많고 무대 분위기도 좋았다.
손님들이 앵콜까지 청하는 모습을 보신 가게 사장님은 그날 나를 불러서 정식으로 돈을 줄 테니 제대로 계약하자고 해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벌게 된 것이었다.
그 생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나서는 꼭 포켓볼을 치러 가서 셋 중 우승자(?)를 뽑았다. 우린 4구는 절대 안 친다. 그리고 나서 Feel을 받는 날에는 당시 유일하게 일산에서
경철이는 무역과, 창원이는 철학과, 나는 영문과, 전공도 다 다르고, 꿈과 성향도 다 달랐던 우리들이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나누었는지, 늘 그렇게 새벽까지 그치지 않는 얘기들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인생과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그 시절, 이성에 대한 동경이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 저마다의 고민과 꿈을 되뇌이던 그 시절...
대학 2학년 때 셋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여자친구가 생겼으니, 대학 1학년 때는 정말 셋이서 그야말로 걸핏하면 만나서 놀았던 것 같다. 심지어 우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셋이 만났다.
셋이서 일산에서 보낸 대학 1학년 시절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 우리는 술을 정말 많이 마셨다. 중간에 어느 포장마차도 들렀는데, 이미 잔뜩 취한 우리들은 커다란 목소리로 대학생티(?)를 팍팍 내면서 사회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한껏 폼을 잡으며 떠들어댔고, 아마도 경철이 때문에(?) 운동권, 한총련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우리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던 어른(그래봐야 당시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음)들이 “90년대에도 대학생이 있었나?”하면서 뇌까리는데, 아마도 80년대에 운동(?) 꽤나 하셨던 분이었나본데, 이제 대학 1학년들이 겉멋처럼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게 못마땅했나보다.
어쨌든, 우리는 괜히 그 포스(?)에 쫄아서 목소리를 낮추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자리를 옮겨서 또 술을 마셨는데, 나는 이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절’이라는 것을 해봤다.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하다가 넘어졌는데, 그만 좌변기에 머리를 부딪혀 한 동안 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한 참을 그렇게 자빠져 있다가 눈을 뜨니 변기가 보이고, 내가 기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30분 넘게 그렇게 기절해 있었던 것 같다.
얼른 자리로 돌아가보니 창원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창원이는 허리 디스크가 매우 심각한 상태였는데, 경철이는 취해서 테이블에서 잠이 들어버렸고, 화장실에 간 나는 좀처럼 돌아오질 않는데, 창원이가 안쪽 자리게 앉았었고, 그런데 디스크 때문에 조금도 힘을 쓸 수가 없으니 바깥 자리에 앉아서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버린 경철이를 깨우지도, 옮기지도(?) 못했던 것이다.
창원이는 정말 고민했다고 한다, 잠든 경철이를 어떻게 처리(?)할 지, 그리고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본인은 허리 디스크로 조금도 힘을 쓰지 못하는데,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그러고 보니 그 술집은 ‘비어월드(Beer World)’라는 우리들의 단골 아지트였다.
‘비어월드’는 당시 막 생겼던 ‘편의방’으로, 술집 안에 작은 편의점과 테이블이 같이 있어서 술과 안주를 저렴하게 사서 그 자리에서 먹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 ‘비어월드’는 가게 인테리어도 좀 구리고, 위치도 별로 좋지 않아서 정말 갈 때마다 손님이 너무 없었다. 열 번을 가면 아홉 번은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했고, 정식 술집보다는 술도, 안주도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 게다가 여기가 거의 밤을 새도록 영업을 해서 정말 자주 갔다.
나중에는 사장님과도 친해졌고, 어차피 손님도 우리밖에 없으니 창원이가 가져온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해서 우리만을 위한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곤 했다.
아쉽게도 이 ‘비어월드’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았고, 지금도 일산 고향집에 갔다가 그 앞을 지날 때면 ‘비어월드’에서 보낸 수 많은 밤들이 떠오른다.
또 기억나는 사건은 앞서도 언급한 내가 노래하는 생맥주집에서 발생한 창원이의 폭력(?) 사건이다.
감성적이고 생각이 참 많았던 창원이는 오히려 대학에 와서 일종의 사춘기 같은 것을 겪은 것 같다. 본인이 아니라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지금 떠올려봐도 창원이는 분명 당시 나름대로 정신적 방황기 혹은 갈등기 같은 것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하루는 역시나 내가 노래하는 생맥주집에 셋이 모였는데, 우리보다 적어도 열 살은 많아보이는 남자 손님(하필 가게 사장님 친구였음)과 창원이가 시비가 붙었고, 서로 간 주먹다짐까지 가는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
내가 그 모든 상황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창원이가 조금 오버해서 발생한 일인 것 같았다.
경철이와 나는 혼비백산해서 뜯어 말렸고, 나는 창원이를 끌어내려 안간힘을 썼고, 그런데 그 손님은 당시만 해도 새파랗게 어린 우리(창원이)와 주먹다짐을 벌인 게 너무나 분했던지 그냥 끝낼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창원이를 끌고 나가는 중 경철이가 그 분께 사과를 했는데, 그 분은 경철이의 안경을 빼았고 창원이를 다시 데려오지 않으면 안경을 안 주겠다고 했나보다.
건물 밖에서 우리는 창원이가 그 손님에게 가서 (어쨌든 우리가 훨씬 어렸고, 소위 선빵을 창원이가 날렸으니) 사과를 하고 경철이 안경을 찾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창원이는 경철이에게 안경을 하나 사줄 테니 다시 돌아가서 사과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그 때 내가 본 창원이의 눈물은 어떤 두려움이나 슬픔이나 후회가 아닌, 당시 창원이가 겪고 있었을 방황에 대한 답답함의 눈물이었다. 그 답답함이 그 말도 안 되는 싸움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창원이의 눈물을 나만 읽은 것은 아니었고, 우리 중 가장 맏형 같았던 경철이 역시 창원이의 눈물을 읽었는지 창원이에게 사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결국 경철이와 내가 다시 가게로 들어가서 그 손님에게 사과했는데, 다행히도 별다른 마찰 없이 그 쪽에서 사과를 받아들였고 경철이의 안경도 돌려주었다.
다시 밤거리로 나온 우리 셋, 그 어느 날보다 술에 취하고 싶었던 우리는 역시 앞서도 언급한 새벽까지 여는 투다리에 가서 소주를 진탕 마셔댔던 것 같다.
그렇게 감정이 풍부했던 창원이와는 달리, 나는 경철이의 감정 표현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즐거워도 뛸 뜻이 즐거워하는 표현이 없었고, 힘들어도 크게 힘든 내색을 안 했다.
내가 상병 시절에 휴가를 나와서 창원이와 함께 이등병인 경철이를 만나러 강원도 경철이네 부대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경철이는 1박 2일 외박을 나왔다.
나 역시 힘든 이등병 시절을 보냈기에 경철이 역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 녀석은 당시에도 정말 별로 힘든 내색도 안 하고 우리와 노는 내내 그냥 평소 모습 그대로일 뿐이었다.
그러나, 훗날 나는 끝내 경철이의 눈물을 보게 되었다. 지금 떠올려도 믿어지지 않는 가슴아픈 일이 일어났다. 경철이의 막내 동생이 그만 사고로 하늘 나라로 떠난 것이었다.
나는 경철이의 막내 동생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늘 경철이네 집에 전화하면 경철이와 목소리가 너무 비슷한 경철이의 막내 동생이 받아서 나는 늘 경철이로 착각하곤 했다.
참 바르고 착하고 똑똑한 녀석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경철이의 전화를 받고서 수화기 너머로 막내 동생이 하늘 나라로 떠났다는 경철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갑자기 멍~ 해져서 경철이한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도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 창원이는 한국에 없었고, 빈소에 혼자 찾아간 내 앞에서 보였던 경철이의 눈물은 그 어느 누구의 눈물보다도 무겁고 뜨겁게 느껴졌다. 늘 어른스럽고 그야말로 맏형 같은 이성적인 모습만 보여왔던 경철이였기에.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나는 한창 영국 나올 준비로 하는 일이 워낙 많아서 경황이 없었고, 또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의 상을 처음 겪은 것이라 부끄럽게도 뭘 잘 몰랐던 것 같다.
원래는 경철이 곁에서 일도 돕고, 위로도 해주고 그랬어야 하는데, 지금 떠올려보면 친구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너무 미안해진다.
한편, 그렇게 셋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공유했던 대학 시절에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리가 서른 넘어서 이렇게 만나기가 어려워질 줄은.
대학 1, 2학년 시절에는 세상과 사회에 대한 답답함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우리가 젊었기에 그저 그 모든 갈등과 고민들을 이야기하는 것 조차 즐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린 마냥 거기에 머무를 수는 없었고, 인생의 다음 계단을 밟고 올라서야만 했다.
내가 중간에 미국에 1년 가량 다녀왔고, 창원이는 호주, 인도를 다녀오면서 조금씩 셋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점점 뜸해져 갔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이미 장기 정착을 목적으로 영국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셋 중에서 창원이가 가장 먼저 취업이 되었다. 영화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언론의 길도 꿈꾸었던 감성적인 철학도 창원이는 녀석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반 회사에 입사했다.
추운 겨울 날 창원이의 취업을 축하하기 위해 연신내에 모인 우리, 방바닥이 따뜻한 어느 횟집에서 정작 주인공인 창원이는 취업 준비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드러누워 잠이 들었고, 경철이와 나만 냅다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 녀석이 지원했던 다른 회사로부터도 바로 다음 날 합격 통보를 받았고, 그래서 처음 가기로 했던 회사가 아닌 나중에 합격 통보를 받은 회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고 우리는 다시 연신내에 모여서 또 축하 회포를 풀었고, 또 그 횟집엘 갔던 것 같다.
그렇게 창원이 녀석이 일 년 가량 회사를 다니다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그 좋아하는 중국에 인생 일대의 모험을 하러 떠나버렸다.
우리 셋이 마지막으로 같이 모인 자리는 창원이가 중국으로 떠난다고 해서 만났던 2005년의 어느 봄날이었고, 몇 달 뒤에 나는 영국으로 떠나오면서 그 때 이후로 우리는 지금까지 정말 단 한 번도 셋이 만나지 못했다.
창원이는 그렇게 홍콩영화를 좋아하고 중국을 좋아하더니 결국 중국에서 지내는 중 아리따운 중국 아가씨와 결혼을 해서 중국에 아예 정착해 버렸다.
그나마 경철이가 한국을 지키고(?) 있지만, 이렇게 창원이와 내가 외국에 정착한 탓에 셋이서 정확하게 일정을 맞춰서 얼굴을 보는 게 너무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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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셋 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살면서, 안 그래도 먹고 살기 바쁜 30대를 보내느라 서로 연락도 자주 못 하면서 이렇게 하염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다.
다행히 지난 겨울 휴가 차 한국을 방문해서 몇 년 만에 경철이를 겨우 만났는데, 녀석이 자꾸 소주를 원샷하자고 하더니만 금방 꽐라가 되어서 아쉽게도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한 채, 옛날처럼 조용히 잠들려는 경철이를 얼른 택시를 태워 들여 보내야 했고,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경철이와 사진 한 방도 못 찍고 헤어졌다.
내가 갖고 있는 우리 셋이 찍은 사진은 창원이 졸업식 날 찍은 이 사진이 유일하다. 사진 속의 우리들은 아직 뭘 모르는 20대 청춘에 머물러 있다. 지금보다 20kg은 덜 나갔던 나의 날씬한 모습이 낮설게까지 느껴진다.
언제쯤에나 우리 셋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녀석들을 추억하다 보니 소주가 급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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