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가 없었더라면...

by 유로저널 posted Mar 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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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가 없었더라면...

    역사에서 우연과 필연의 비중은? 역사상 사건이나 혁명은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이 모종의 역할을 수행했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드나 아니면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가끔 지나간 때를 회고하면서 일반인들도 제기하는 골치아픈 문제가운데 하나이다.  
    1985년 3.11일은 당시 소련(USSR: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공산당 서기장에 미하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취임한 날이다. 고르바초프는 그렇다면 왜 결과적으로 소련 붕괴에 이른 개혁정책을 취했을까? 미국과 자웅을 겨룬다고 생각되던 거대제국 소련을 그 나라의 공산당 서기장이 붕괴 시키려 개혁정책을 실시했을까? 고르바초프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유럽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1990년 10.3일 통일로 사라진 동독, 개인숭배로 악명을 떨쳤던 루마니아... 이런 국가들도 아직 공산독재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고르바초프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서기장 취임 25주년을 전후해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nternational Herald Tribune: IHT)지는 최근 고르바초프가 세계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분석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필자는 아치 브라운(Archie Brown) 옥스퍼드대학교 정치학과 명예교수로 사회주의 연구로 유명한 인물이다. 글을 분석하면서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평가해보자.

     소련을 보존하기 위한 개혁... 그러나 개혁은 자체 모멘텀을 보유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54살이었다. 소련 역사상 최연소 서기장이었고 서방국가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중의 하나가 당시 영국의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였다. 회고록 ‘다우닝街에서 보낸 시절’(Downing Street Years)에 따르면 그는 소련의 개혁정치가를 찾던중 참모들의 의견과 자신의 의견을 종합해 고르바초프를 영국으로 초청, 총리 별장인 체커스(Chequers)에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이 때 대처는 고르바초프를 ‘함께 일을 할만한 사람’(a man to do business with)라고 평가했다.  
    어쨌든 고르바초프는 집권 초기에는 비교적 조심스럽게 행보했다. 이어 점차 글라스노스트(Glasnost, 정보공개)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정책)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주의를 보존하기 위한 개혁정책을 도입했다.
    자신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당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필요했다. 당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던 신문과 방송이 당시 금기라고 여겼던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를 보도하거나 2차대전 당시 소련이 폴란드 장교들을 집단 학살했던 사건도 보도했다. 또 1930년대 스탈린이 인민재판식의 재판으로 수많은 반대파들을 숙청했던 사건도 보도했다. 당이 독점했던 역사통제를 일부 해제했다. 이런 역사해석은 그러나 2차대전 후 소련에 강제 합병된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분리독립 운동을 촉발시켰다. 또 소련 사회내 개혁세력도 결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런 글라스노스트라는 기반을 통해 경제구조를 재개혁, 생산성을 높여 경제발전을 꾀하자는 안이었다. 알렉산더 야코블레프(Alexander Yakovlev)가 생필품 가격 자유화 등 시장개혁을 도입하는 개혁안도 제시해 일부 시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소련사회를 보존하기 위한 개혁이 정반대로 소련 사회의 생존자체를 위협하게 되었다. 일단 개혁이라는 ‘지니’(알라딘과 요술램프에서 나오는 병속의 요정)가 밖으로 나오니 이를 병에 다시 마음대로 집어 담을 수 없었다. 개혁파나 시민들의 변화 욕구가 더 커졌고 이들은 점차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미진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결과가 나왔다.
    몇 년전 고르바초프의 처 라이샤가 독일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독일 정부는 고르바초프가 없었더라면 독일 통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다. 물론 1949년 건국 후 서독 정부의 통일정책과 당시 총리였던 헬무트 콜(Helmut Kohl),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 등의 노력이 있었지만 만약 고르바초프가 동독 시민들의 시위를 유혈진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고마움에 그의 처를 독일에서 무료로 치료받게 해주었다.      
    아직도 고르바초프의 개혁동기와 과정, 결과 등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1980년대 억압된 권위정부의 치하에서 대학생활을 했던 필자는 고르바초프의 정책에 관심을 가졌었다. 역사라는 도도한 물결은 때론 급류가 되기도 한다. 그의 취임 후 6년만에 소련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운명이 되었다.
     안 병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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