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지난 12월 22일, 내가 활동하는 가야금&기타 듀오 KAYA가 런던 시내 유명한 병원인 Chelsea and Westminster Hospital에 연주를 다녀왔다. 벌써 이 병원에서만 세 번째 갖는 연주다.
병원에서의 연주는 우선 병원을 방문한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병원 라운지에서 마이크와 스피커도 설치해서 정식으로 연주를 하고, 잠시 휴식을 가진 뒤에 이후에는 개별 병동 두 군데를 방문해서 연주를 한다.
라운지에서의 연주는 장소만 병원일 뿐, 어차피 평범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주이기에 별로 특별할 게 없지만, 개별 병동에서 환자들을 위해 하는 연주는 매번 갈 때마다 참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한다.
지난 번에 이어서 이번에도 뇌졸중 병동을 찾았다. 병동에서는 환자들이 침대에 누워있는 개방된 병실들 앞 복도에서 마이크도 없이 그냥 악기만으로 연주한다.
비록 마이크도 없이 하는 연주지만 환자들이 대부분 스스로는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거의 할 수 없는 상태로 그저 누워만 있기에, 간혹 병원 근무자들이 내는 작은 소음만이 간간히 들릴 뿐, 그 적막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는 오히려 크게 느껴진다.
기타를 연주하면서 누워있는 환자들을 바라보곤 한다.
혼자서는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는 환자들, 온 종일 말 한 마디 건넬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이 외로움에 고립된 채,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에게도 역시 언젠가는 저렇게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그리고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 실감나게 다가온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절대불변의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특히, 요즘처럼 매 순간 정신 없이 흘러가는 최첨단 문명의 현대사회는 더더욱 우리들로 하여금 ‘죽음’이라는 실체를 잊고 살도록 만든다.
다들 먹고 사느라, 돈 벌고 출세하느라 너무 바쁘다. 최첨단 휴대폰과 각종 전자기기들을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듣느라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사색에 잠기고 내 삶을 돌아볼 여유를 갖는 게 너무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간혹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시거나.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뿐, 그러나 이마저도 다시 바쁜 일상에 쫓기면서 금새 잊혀지곤 한다.
아마도 그렇게 병원에 누워 있는 환자들 역시 그렇게 병원에 입원해서 죽음을 기다리기 전까지만 해도 ‘죽음’은 그들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려본, 말 그대로 잘 나가는 인생을 살다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심지어는 지금 그렇게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게 더 낫다고 여길 만큼 세상의 밑바닥에서 고통스런 인생을 살다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 그들 모두는 지나온 날들을 떠올리며 수 많은 후회와 아쉬움에 잠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지난 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들은 분명 지금까지 자신들이 살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살 것이다, 이제 그들은 살아가는 한 순간, 한 순간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깨달았을 것이기에...
우리는 정신 없는 현실 속에서 당장 눈 앞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작은 것에도 화를 내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불평하고, 마치 영원히 살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흘려 보낸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또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때로는 그렇게 틀어진 마음을 몇 년 동안이고 풀지 않은 채 살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욕심에 휘둘린 시간, 화를 낸 시간, 불평한 시간, 누군가를 미워한 시간, 그 시간들이 훗날 죽음을 기다리게 될 때면 얼마나 후회스럽고 아쉽게 느껴질까...
그 때에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고 덜 아쉬워하려면, 그래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조금이라도 더 용서하고, 더 이해하면서, 또 조금이라도 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만끽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하고 아름답게 보낼 수 있는 이 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 것인지...
삶이 고단하게 느껴질 때면, 내가 가진 게 너무 적어서 불평하고 싶어질 때면, 화나 나거나 누군가가 너무나 미워질 때면, 나는 눈을 감고 병실 복도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그리고 가만히 스스로에게 되뇌어 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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