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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흑인이 최초로 진출한 스포츠는 '경마'

by 유로저널 posted Dec 2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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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의 흑인(미국에서'African American’이라 부름)들이 오마바 대통령 당선자처럼 정치계나 연예계 등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미국인들의 가장 열광하는 스포츠 분야에서 흑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미식축구, 프로농구, 프로야구, 골프, 테니스 같은 메이저 종목은 물론이고 육상이나 수영 등의 기초종목에서도 흑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은 흑인 기수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미국에서 흑인들이 최초로 진출한 스포츠는 경마였다.

1776년 미국의 독립과 함께 경마는 미국 최초의 대중 스포츠로 등장한다. 1863년에 뉴욕의 사라토카 경마장, 1875년에 켄터키의 처칠다운즈 경마장이 건설 되면서 경마는 큰 성장세를 보이며 발전하게 된다.

한편 흑인 기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백인 지주들의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신분을 얻은 흑인 기수들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은 것이다.

흑인 기수 17세기 중반부터 미국 경마계에 등장

미국의 흑인들이 최초로 진출한 스포츠가 경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 처음 경마가 소개된 것은 1665년이고 흑인 기수들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600년대 후반부터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에서 수입된 서러브레드 경주마의 소유여부가 개인의 부와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던 시기였다.

이런 이유로 당시 많은 백인 부자들이 서러브레드 경주마를 소유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경주마 관리나 조교를 자신이 소유한 흑인 노예들에게 맞기면서 서러브레드 경주마를 잘 다루는 흑인노예 중 상당수가 경주마 기수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제1회 켄터키더비 15명의 기수 중 13명이 흑인

1875년 역사적인 제1회 켄터키더비에 참가한 15명의 기수 중 13명이 흑인 기수였다. 물론 우승기수 역시 우승마‘애러스타이디즈(Aristides)'에 기승했던 흑인기수 ’올리버루이스(Oilver Lewis)' 였다.

켄터키더비 기록에 따르면 흑인 기수들의 활약은 이후 상당기간 이어져 28회 대회가 열렸을 때까지 15번이나 흑인 기수들이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흑인 기수들의 활약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올리버루이스(Oilver Lewis)' 외에도 미국 경마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흑인 기수들은 무수히 많다. 그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기수들을 찾아보면 먼저 '위리엄워커(William Walker)'가 있다. 1877년 '위리엄워커(William Walker)'는 제3회 켄터키더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최초로 미국경마 명예의 전당(National Museum of Racing and Hall of Fame)에 헌액된 기수인‘아이작머피(Isaac Murphy)’는 14살 때부터 기수생활을 시작해 최초로 켄터키더비 3회(1884년, 1890년, 1891년)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고 통산 1,412전 628승으로 44%라는 최고 승률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또 1892년 ‘로니클레이튼(Lonnie Clayton)’은 15살의 나이로 켄터키더비에서 우승을 차지해 역대 최연소 켄터키더비 우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역시 미국경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윌리심스(Willie Simms)’는 켄터키더비에서 두 번(1896년, 1898년)이나 우승을 하고 1893년과 1894년 벨몬트스테익스를 연달아 제패(Back to back)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900년대 초반까지 본격적으로 미국 경마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던 흑인 기수들의 전성기는 1902년 ‘지미윙크필드(Jimmi Winkfield)’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켄터키 태생인 ‘지미윙크필드’는 1898년 16살의 나이로 기수 생활을 시작했다.

켄터키더비의 20세기를 열었던 1901년과 1902년의 켄터키더비를 연달아 우승하고 1903년에도 우승에 도전했으나 2착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러시아로 옮겨가 러시아더비를 4번이나 제패했고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여러 차례 그랑프리 대회를 석권한 후 통산 2,600승 이상을 우승하고 은퇴해 조교사로 전직해 1974년 그가 사망했을 때까지 프랑스에 거주했다.

2004년 ‘지미윙크필드(Jimmi Winkfield)’ 사후에 미국경마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으며 같은 해 미국연방하원은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위대한 스포츠정신을 구현한 그를 기념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인종차별이 흑인 기수들을 경마장에서 몰아내

‘지미윙크필드(Jimmi Winkfield)’가 활약한 1900년대 초반 이후에는 미국의 경마장에서 흑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우선 1908년에 미국전역을 강타한 강력한 규제정책으로 314개에 달했던 경마장 수가 25개로 줄어든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1940년대 미국남부지역에서 횡행했던 흑백분리 정책(Jim Crow)으로 대부분의 흑인 기수들이 경마장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흑인 기수들과 경마가 함께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흑인 기수들이 사라진 자리에 한동안 백인 기수들이 자리를 잡더니 현재는 히스패닉계 기수들의 거의 미국 경마장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로저널 장 태진 기자
eurojournal@ek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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