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은 어느 시대든 국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특히 문(文)을 숭상했던 조선시대가 더욱 그러했다. 조선시대는 원칙적으로 천민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에게 군역(軍役)의무를 지도록 했다. 당시 군역은 서울로 올라와 현역으로 근무하는 ‘번상(番上)’과 이들 군인의 생계를 돕는 ‘보인(保人)’ 또는 ‘봉족(奉足)’으로 구분했다. 봉족은 번상의 생계를 위해 1년에 포(布) 2필 정도를 바치도록 했다. 이러한 군역의무는 16살에 시작하여 60살이 되어서야 면해 졌다. 어느 경우든 군역은 평생을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부담이었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군역 회피에 혈안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내려올수록 기피현상은 심해졌고, 그 수법도 다양해 졌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군역을 피해 도망을 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대신해 현역근무를 하도록 했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군역의무를 지는 양인신분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후기 군역면제가 양반의 특권으로 고착화되자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위해 온갖 비리가 난무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군역의 의무가 없는 노비를 자원하거나 승려가 되었다. 여유가 있는 양인은 군역이 면제된 향교에 입학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이것저것 할 수 없는 사람들은 평생을 군역의 굴레에서 신음했다. 일부는 신체를 훼손해 군역을 피했다. 흔치 않은 예이긴 하지만 자신의 성기를 잘라 아이의 출산을 막기도 했다. 삼정(三政) 문란에서 보듯, 갓난아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이른바 ‘황구첨정(黃口簽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병역기피는 해방 후에도 여전했다. 1960년 말 제대군인 1백50만명에 병력기피자 10만명에 달한다는 통계를 봐도 그렇다. 이때는 주로 입영제한연령이 만30세라는 규정을 악용하여 차일피일 입영을 미루다가 ‘고령’을 이유로 면제를 받는 수법이었다. 주로 상류층에서 해외이민이나 유학을 빙자해 만30세까지 해외에 버티다가 영구 귀국하는 방법이었다. 이와 함께 조작된 질병도 병역기피에 한몫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8년에 불거진 병역 비리 사건이다. 그리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자르는 자해나 문신을 통해 병역을 기피하는 수법도 널리 애용되었다. 근래는 원정출산을 통해 병력의무를 조기에 기피하는 방법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국적포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규정한 새 국적법 시행을 앞두고 국적포기자가 2천 여명에 달했다는 보도다. 특히 이들 중에는 고위 공무원, 국/공립대 교수, 대기업 임직원 등 사회고위층 자손이 포함돼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의 국적포기 사유가 다름 아닌 병역기피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 병역기피자는 대부분이 권력이나 돈께나 있는 상류층이다. 힘없는 사람들이 군대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이들은 온갖 혜택을 받으며 일신의 영달에 취해 있었다. 그런 부류가 정작 조국이 필요할 때면 외면하는 현실이다.
이번 이광재 의원의 단지(斷指) 논란도 예외는 아니다. 단지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던 이로 인해 군 면제를 받았다. 좋게 평가하면 노동운동 조직사수로 민주화에 기여했다지만 달리 보면 조국에 대한 배반이다. 더구나 혈서를 쓰기 위해 단지까지 했다는 변명은 상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느 인사의 옹호 글처럼 “단지(斷指)를 통해 ‘파쇼군대’, ‘양키용병’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선배들이 있었다”는 실토에 놀라울 따름이다.
병역은 개인에게 부과된 가장 성스러운 책무다. 거기에는 의당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이를 이행함에 있어 계층도 이념도 소신도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시대를 초월해 병역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특권의식이 낳은 폐해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 가계 상당수가 병력기피나 면제의 사유를 갖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이번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도 영국과 같은 서구 사회의 상류층이 병역을 마쳐야 지배층 일원으로 인정받는 풍토를 벤치마킹해야 할 시점이다.
The euro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