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분단되고 민족간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한국 전쟁이 휴전된 지도 벌써 반 세기가 훌쩍
넘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숫자가 준 만큼 남북의 갈등은 줄어들었을까?
제 3자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내전의 일종이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추상적인 의미의 '민족 내부의 폭력'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형태로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아픔은 냉전시대의 체제 경쟁과 독재를 바탕으로 한 내부적 단결이라는 미명아래 증폭되어 왔다.
그들이 왜 적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우리는 대결의 장으로 지난 반 세기를 내몰려 왔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북한을 '무찔러 없애야'할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실제로 현 한반도 정세에서 남북 문제는 엄밀히 말해 사상이나 전쟁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기 보다는,
'경제협력'과 '핵개발'이라는 훨씬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엄청난 군사력은 결국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기회비용을 대가로 한다.
그렇기에 남북간의 평화 정착은 동북 아시아 전체를 관통하는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핵프로그램신고서' 제출은 단순히 상징적인 그 무엇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 해 10.3 합의에 따른 마감시한을 넘긴 지 6개월만에 북한이 지금까지 생산한 플루토늄 양 등을 적시한
핵프로그램 신고서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제출한다.
동시에 미국도 북한이 신고서 제출과 동시에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등의 절차에 착수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27일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가 전 세계에 중계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 것이다.
엄밀히 말해 북한이 제출할 신고서는 플루토늄 생산량 및 사용처, 영변 원자로를 비롯한 핵 관련 시설 목록 등
을 담고 있지만 정작 핵무기 개수와 같은 직접적인 수치는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라늄농축프로그램 및 시리아와의 핵 협력 관련의혹에 관한 사항은 지난 4월 싱가포르에서의 북미
회동에서 밝힌 바와 같이 비밀문서로 정리하기로 합의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 신고서에 담기지 않는다.
즉 다시 말해 북한의 핵프로그램 신고서 제출은 미래를 향한 퍼포먼스인 셈이다.
미국 역시 이번 단계를 실질적인 성과 이전에 상징적인 성과로 내세울 것이다.
대선 전에 외교적 성과가 필요한 부시 행정부로서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이번
조치를 결코 놓칠 리 없다.
결국 미국과 북한의 협력에는 어떤 '필요'가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이번 조치에 이어질 다음 단계이다.
북한이 신고서를 제출하면 6자회담은 2단계 핵신고 및 불능화 과정을 마무리 하고 3단계 핵폐기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다.
우선 이번에 제출하는 신고서에 대한 검증 문제가 가장 큰 현안이 될 것이고 이 과정을 마친 후에야
사실상 6자 회담이 순행할 것이다.
당장 미국은 북한이 신고서 검증에 적극 협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폐연료봉인출 작업을 시급히 마치는 것 역시 향후 있을 회담전망을 좌우할 수 있는 고비 중에 하나이다.
북한 역시 경제, 에너지 지원 등의 상응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이제 북핵문제는 2/3를 간신히 넘어선 셈이다.
그렇기에 향후 일정에서 우리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 지가 중요하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렇기에 서로 간의 필요가 일단 충족된 순간 다음 단계를 진행하는 것은 훨씬 더딜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 정부에게 주어진 일은 그러한 '필요'들을 창출하고 조정하는 일일 것이다.
과연 우리와 북한은 어떤 측면에서 서로의 '필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전 정부와 반대되는 정책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좀더 창조적이고 유연한 '실용적' 관점이
현 정부에게 요구된다.
11월초에 치러질 미국 대선 이전에 북핵 문제가 결정적인 분수령을 넘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성과가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다시 굴러 내려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 당국은 지금 맞고 있는 기회와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위험을 직시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 당사국들은 북한을 압박하고 유도함에 있어 물샐틈없는 협조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