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고 흐르는 한강,거무튀튀한 방벽을 이루며 늘어선 건물들,매캐히 번지는 자동차의 배기연으로 가득찬 도로와 숨막히는 전철에 몸을 실은 피곤한 군상들. 지난 반 세기 서울의 모습이다.누군가는 '럭키 서울'을 노래하고 또 누군가는 '손톱에 낀 때에 두둑한 뱃살을 두드리는' 풍경으로 묘사한 바로 그 서울이다. 하긴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할 정도니 그 상징성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렇게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다. 서울엔 없는게 없었다.택시가 있었고,버스 안내양이 있었고, 룸싸롱이 있었고, 멋진 자가용으로 출퇴근 하는 사장님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서울'에 살았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일꾼'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밀집한 공단 쪽방에 자리를 잡았다. 판자촌이 늘어서고, 연탄불 때던 시영아파트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러다 그 땅이 모자랄 무렵 또 사람들은 서울 주변의 신도시로 '반강제(?)'로 흩어졌다. 그 와중에 조상 덕에 땅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고, 남는 돈으로 사둔 아파트가 껑충 뛰는 바람에 '졸(지에) 부(자)'가 되기도 했다.
얼마나 사람들이 급격하게 모였던지,우리 기억에 '개발 지상주의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 모습이 심히 보기 그랬나보다. '수도권 규제'라는 정책은 이미 1960년대 부터 실시되었다.수도권 투자를 강제로 억제하면 어쩔 수 없이 투자처를 지방으로 옮겨 전국토가 균형 있게 발전할 것이고,과밀화한 수도권의 인구 집중도 억제될 것이라는 논리다.수도권 탈규제는 법률적,조직적,재정적 지원을 통해 지방을 충분히 육성시킨 뒤에나 검토한다는 것이다. 법원도 두 손 걷고 거들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법인세 차등 부과는 '정당한 것'이라며 수많은 소송을 기각시켰다.
그렇게 50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의 현실은 암담하다. 산부인과 병원은 군청 소재지에도 드물고,제대로 된 치과병원이 없어 다들 '야매'로 이빨을 때운다. 변호사를 찾을래도 전화번호를 모른다. 그나마 만들어진 농공단지에서도 김치나 담글 수 있으면 다행이라 여긴다. 인건비를 줄인 지방의 각종 공장들의 환경은 안전 사각지대로 전락한 지 오래다. 여전히,사람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를 서울로, 서울로 보낸다.그렇게 비어가는 지방은 휑하니 귀신집같은 미분양 아파트만 쌓여갔다.
그런 상황을 '야인'처럼 살았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실물 경제의 위기로 번지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7% 성장 어쩌고 하던 낙관론은 알아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완전히 '전시체제'로 돌아섰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기 부양책을 33조라는 액수에 담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금융위기에 대한 선제적 대응차원에서 지난 9월 1000억달러 규모의 외화차입 지급보증을 주요 내용으로 한 금융시장 안정책이 나온데 이어 지난달에는 아파트 미분양 등에 따라 유동성 부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설시장 지원책을 내놨다. 정부의 이 같은 시장안정과 경기회복 대책은 곧이어 한동안 금기로 여겼던 수도권지역의 공장신증설에 대한 규제완화책까지 발표했다. 경제부처 장관들이 공동기자회견 방식으로 3일 발표한 경제종합대책은 무려 33조원이 지원되는 그야말로 경제난국 타개를 위한 경기활성화의 결정판이다. 이번 대책의 핵심은 수정예산을 통한 재정지출 확대, 내수진작을 겨냥한 부동산등 각종 규제완화,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자, 농어업인을 위한 보증지원 등 미시정책은 물론 거시정책까지 모두 동원했다. 여기에 종부세 완화는 일종의 덤이랄까?
마치 온 몸이 다 아플 것 같으니 그 모든 통증 부위에 대응하는 약 하나씩 하나씩 투여한 꼴이다. 어찌보면 가상하고 어찌보면 참 근시안적인 정책의 잡탕이다. 그동안 언론들이 정부의 늑장 대응에 비판을 쏟아내니, 모든 분야에서 선제 대응하겠다는 오기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수도권 집중도는 50%를 넘어섰다. 수도권 규제 정책이 유지되어도 2020년에는 60%에 육박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과밀한 수도권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지금도 시원찮은 수도권 인프라를 확장해야 하는데 도로를 제외한 철도와 항공의 수도권 집중도는 70%에 달한다. 남은 건 도로 건설 뿐인데, 수도권 도로의 경우 보상비만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투자 확대를 위한 수도권 규제 완화가 오히려 비효율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단기적인 부동산 부양 정책은 결국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결정적으로 뒤흔들 것이다. 정책 당국자는 이런 우려에 대해 '그럴 경우 다시 규제하면 된다'고 큰소리친다. 그런데 그 당국자는 알까? 그렇게 정책당국의 혼란이 불신을 낳았고 유별난 금융혼란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수도권 규제완화에 관한 진리 한 가지는 이렇다. 수도권 집중의 확연한 둔화와 감소, 그리고 지방의 균형적인 발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