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면과 그가 남긴 과제.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단어를 짐지운다면 그 운명의 한 편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이는 바로 죽음이다.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숙명이자 과제로서 죽음은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는 근본이다. 즉 존재는 소멸을 통해 가치를 획득한다.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은 또한 단절과 연속이라는 독특한 삶의 양식을 부여했다. 필부의 영면조차도 곧 모든 것의 소멸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이 한 구비를 돌아나가고 또 다른 물줄기를 만나는 지점인 셈이다.
엊그제 우리 역사의 한 인물의 하관(下棺)을 목도했다. 그의 삶의 깊이와 풍성함만큼 그 구비도 넓고 깊었다. 평생을 투쟁하면서 동시에 또 누군가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살았던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앞으로의 길을 인도했다. 그는 평생을 싸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정적들을 화해와 통합의 가슴으로 껴안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가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지난 반 세기 질시와 반목으로 보냈던 민족의 화해와 대단결이었다. 그의 마지막 메세지 역시 명확하다. 민주세력의 결집, 민족적 화해, 사회 대통합이다. 이 세가지가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지난 10여년 간 민주화를 이끌었던 정치세력들은 사실 명확한 지지층과 정당과의 관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해득실만을 바탕으로 이합집산하기 일쑤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보수정당과 별 다른 차이가 없는 정책지향이나, 당내 세력 구도에 따른 기득권 유지에만 관심을 보인 것은 구 열린우리당과 현 민주당 모두의 책임이다. 또한 지지계층이 겹치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과의 제휴도 적극적이지 못했다. 용산참사에서 보여준 소극적 연대와 달리 쌍용자동차 사태에 너무나도 무력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은 민주당이 과연 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약자들을 껴안을 수 있는 정당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고인이 민주당에 남긴 과제는 바로 이런 연대의 회복일게다.
또 그의 죽음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계기도 만들었다. 북한이 파견한 조문단은 단지 조문만 하고 돌아가는 차원이 아니었다. 북한의 메세지를 가슴에 품고온 특사단이었던 셈이다. 남북관계가 완전한 파국을 맞기까지 몇 발자국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 양쪽이 서로 말을 먼저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실천이다. 북한은 현재 여전히 억류되어 있는 연안호 선언들을 석방해야 한다. 또 추석 이산가족 상봉도 원활히 진행될 수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정부 역시 북한이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을 자신들의 대북정책이 성공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는 이미 고인이 쌓아논 신뢰관계의 연장선일 뿐이다. 현 정부가 기여한 바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공이 남측으로 넘어온 이상, 정부 역시 구체적인 행동과 메세지를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민족적 화해는 다시금 멀어지게 될 것이다.
2009년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한 해이다. 그러나 또 그만큼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이 필요한 해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정부는 말로만 사회통합을 외치고 있다. 약자와 소외계층을 돕겠다는 말은 진저리치게 들었으나 정말 얼마만큼 노력했는지를 살펴보면 미흡하기 짝이 없다. 국민들의 신뢰를 잃기 전에, 진정으로 고인이 남긴 과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현 정부는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고만 하지 말고 지금 천명한 국정기조의 진정성을 보여줄 가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공안통치를 철폐하고 서민경제를 살리며, 남북 화해 협력에 적극 나서기를 희망한다.
<전 유럽 한인대표신문 유로저널, 전 영국 한인대표신문 한인신문, eknews.net>